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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뭐가 있길래 2, 길리

by 날아라빌리

4. 길리에 온 지 셋째 날, 두 번째 맞는 아침.

내일 아침이면 길리를 떠나야 한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마지막 날이 되어버렸다. 동쪽과 서쪽을 몇 번 왔다 갔다 하고 중간에 길을 잃어버려 헤맨 것이 전부인데 벌써 떠나야 하다니. 다음에는 최소 일주일 일정으로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다가 과연 다음이 있을까 생각하니 살짝 슬퍼졌다.

아마도 힘들겠지?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는 올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 이러지 말고 오늘이라도 잘 보내야지. 침대에서 일어났다. 선라이징 패들보드를 타기엔 늦었고 뭘 하면 좋을까. 길리에 오면 뭘 하려고 했더라. 곰곰이 생각하다가 동쪽에서 아침을 먹은 후 서쪽으로 가서 요가를 하고 다시 동쪽으로 달려가 해변에 자리를 잡고 거북이를 본 후 마지막으로 서쪽에서 요가를 하거나 선셋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길리에서의 하루는 동쪽과 서쪽을 오고 가는 것이 전부이긴 하다.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이 길을 달리는 순간이 너무 좋았다. 양쪽 팔 힘의 균형이 맞지 않아 흔들거리는 내 자전거도, 울퉁불퉁한 길도,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마차도, 나를 스치며 아침 인사를 하던 사람들도, 상점의 유리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밝은 얼굴의 나도, 내가 입은 하얀 셔츠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까지도, 그 길 위의 모든 것들이 몽땅 다 좋았다.

카르페디엠.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길 끝에 위치한 카페이다. 이름까지 어쩜 이럴까. 오늘은 여기서 아침을 먹어야지. 자전거를 세웠다.

스무디볼만 시키려고 했는데 아침에만 파는 세트 메뉴가 있다고 추천해서 크로와상과 커피도 시켰다. 커피는 좀 별로였고, 크로와상은 커피보단 나은 정도? 솔직히 스무디볼만 괜찮았는데, 커피맛이 어떠냐며 한국인은 역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지? 하며 찡긋거리는 친절한 직원에게 나도 같이 찡긋거리며 엄지를 치켜들어야 했다. 엄지 척에 신난 직원이(근데, 길리 사람들은 늘 신나 있고 항상 친절하다.) 너 혼자구나?! 하며 사진도 찍어줬다. 그리하여, 드디어 가지게 된 몸통 사진. 혼자 떠난 여행에서 몸통까지 나온 사진을 가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구린 비율이지만 머리와 몸이 붙어 있다. 만세!

구글 지도에 길리의 맛집을 몇 군데 저장해 놓고 갔지만 거의 가지 못 했다.

반얀트리 카페, 프란체스코 피자, 잘리키친, 라뭄바 등은 내가 저장만 해두고 근처에도 못 가본 곳이다. 어쩌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지나쳤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점도 못 찍고 돌아온 듯하여 많이 아쉽다.

길리는 투명한 바다가 아름다운 섬인데 나는 왜 이런 사진만 찍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소가 집 앞 쓰레기를 뒤지는 풍경이 너무 신비로워 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듯 마법 속 세상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서쪽으로 가서 아침 요가를 했다. 요가를 하며 조금 울다가,

"이 정도면 밀수 아냐?" 소리 들었던 진주 쇼핑

동쪽으로 와서 거북이를 보았다.

길리보이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다를 살피고 있으려니 주문을 받던 직원이 내 표정을 보며 수영을 못 하냐고 물었다. 아마도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 바다 위에 배가 너무 많은데? 거북이 보다가 부딪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 괜찮을까?"

"네가 너무 걱정이 되면 내가 같이 들어가 줄게. 거북이는 저~~ 쪽에 있어. 지금 저쪽으로 가면 보일 거야."

"저기?"

"아니, 거기 말고 저~~ 쪽. 저기 저 사람이 아마 가이드일 거야. 저 사람이 있는 곳에 거북이가 있어."

"아하!"


그렇지만, 내가 준비하고 물에 들어가는 동안 거북이가 헤엄쳐 가버렸는지 거북이를 바로 만나진 못 했다. 대신 굉장히 귀엽고 예쁜 물고기들을 엄청나게 많이 보았다. 내내 얕은 깊이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절벽처럼 뚝 떨어지며 깊어져 물이 파랗고 짙은 색으로 변하는 구간이 있는데 그쪽으로 갈수록 온갖 열대어들이 가득했다.

길리의 진짜는 바다 안이구나.

길리의 바다 안에 우주가 있었다.


거북이를 보고 나와 잠시 쉬고 있으려니 인터넷에서 본 대로 진주 상인들이 나타났다. 슬쩍 봤더니 어제 샀던 진주보다 이쁜 듯하여 두어 개 샀더니만 소문이 났는지 또 다른 상인이 다가왔고 역시나 이뻐서 또 샀더니 또 다른 상인이 나타나 츄라이~츄라이~해서 또 샀다. 진주 상인들이 몰려들어 해변가의 슈퍼스타(슈퍼호구)가 된 듯하여 기부니가 좋았다. 헤헷.

해질 무렵엔 다시 서쪽으로 가서 요가를 했다. 저녁 시간엔 플라잉요가를 했는데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께서 자세를 하나하나 다 만들어서 저렇게 요가 고수처럼 사진을 찍어주셨다.

남편한테 냅따 전송했더니, 마침 시어머니와 같이 있던 중이라 시어머니도 함께 보셨다고 한다.

며느리가 혼자 여행 가서 허리춤을 다 내놓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도 우리 어머니는 "아이고, 얘는 이런 것도 할 줄 아네. 너무 잘하네."라고 하셨다고 했네. 스릉함돠, 어무이. 그리고 저건 스앵님이 다 만들어줘유. ㅠㅠ

마지막 밤이니 칵테일이라도 한잔 해 볼까? 싶어 다시 동쪽으로 달려갔다. 엄청나게 깊고 짙은 목소리에 끌려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갔다.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라고 하기 애매한, 아마 평소엔 직원들이 대기하는 듯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박주스를 시켰다가, 그래도 마지막인데 기분이라도 내볼까 싶은 허세로 칵테일도 같이 주문했다. 결국 수박주스만 마셨지만 칵테일을 주문하면 기부니가 조커등요.

그러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길리는 정전이 자주 된다고 한다) 나는 그 순간 꽤 많이 당황하여 '어? 어쩌지? 숙소엔 어떻게 가지?' 하는 생각에 쩔쩔 매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햅삐 뻘스데이 투유~~햅삐 뻘스데이 투유~~

햅삐 뻘스데이 투~~우워우워우워(온갖 아우성들) 햅삐 뻘스데이 투유~~

내 생애 가장 미친 흥이 넘치던 생일축하 노래였다.

정전을 대하는 나와 그들의 자세가 이렇게나 다르구나. 넘쳐나는 그들의 흥을 보며 깔깔깔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너무 미쳐 날뛰길래 살짝 기 빨려서 숙소로 가야 했다. 또 정전이 되기 전에 집에 가야지, 하며 자전거 패들을 열심히 밟았다.

집에 가는 길에 발견한 현수막. 오! 에고!


4. 길리 마지막 날

드디어 새벽 기상에 성공했다. 5시에 숙소에서 나와 동쪽으로 달렸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왜 이렇게 가슴이 울렁이는 걸까. 여름의 시간과 여름의 하늘은 어째서 이렇게 아득하기만 할까. 바로 얼마 전의 기억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 같고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듯 저 먼 곳으로 아스라이 흐려져 간다.

선라이징 패들보드를 탔다. 인터넷에서 볼 땐 분명히 다들 누워서 섹쉬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나는 그 타이밍을 잡지 못 한채 냅따 패들만 저어서 삼등신 비율을 자랑하는 사진뿐이다. 그래도 몸통 사진, 예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스텝들에게 인사를 한 후 다시 항구로 갔다.

배를 타기 위해 체크인을 하고,

길리에서의 마지막 스무디 볼을 먹으며 여길 또 언제 올 수 있을까, 그땐 내가 얼마나 늙어 있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보다 배가 더 나오더라도,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져 있어도, 길리에선 비키니를 입고 거북이를 봐야지. 호주 아줌마들은 배가 산더미 같이 나와도 비키니만 잘 입더라 뭐.

그러니, 길리야 안녕. 언젠가 꼭 다시 올게.

너무 세련되게 변해 있진 마. 여전히 정전 잘 되고, 말똥 가득한 너로 있어줘. 너는 좀 불편하려나. 그래도... 그래도... 조금만 더 여전한 너로 있어줘. 내가 꼭 다시 올게.


+ 다음엔 동쪽에 숙소를 잡고 선셋다이빙과 패들보드 위에서 하는 요가를 꼭 해보고 싶다.


++ 진주는 좀 더 사 올걸. 기념품 선물이란 것이 나한테만 기념이지 다른 사람에겐 예쁜 쓰레기정도도 아니어서 조심스럽긴 했으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기엔 꽤 좋았는데 더 사 오지 못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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