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붓 첫째 날- 여행 4일째
길리에서 오전 10시 배를 타고 빠당바이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우붓으로 왔다.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빠당바이의 2만 원짜리 숙소가 상당히 어마무시했기에 우붓의 3만 원짜리 숙소에 대해선 마음을 비웠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오잉? 여기 왜 좋지? 왜 때문에 욕실까지 정상적이지? 만원 더 썼을 뿐인데. 만원의 행복이 이런 건가. 침구가 폭닥하니 꽤나 맘에 들었다. 기부니가 좋아 콩콩 뛰었다. 문 밖의 풍경들이 길리와는 전혀 달라 여행 온 느낌이 잔뜩 들었다. (아, 여행 중이긴 하네...)
자, 이제 뭘 할까?
우붓은 요가원만 생각하고 온 곳이라 다른 일정이 없었다. 하지만, 래디언틀리 얼라이브, 요가반, 알케미, 인튜이티브 플로우, 요가하우스, 루메리아 등등 가고 싶은 요가원이 많아서 오히려 시간이 부족했다. 요가복만 입고 다닐 생각으로 옷을 아예 가져오지 않았으니 우선은 요가복부터 사 입을까. 그 후에 가까운 요가원 시간표를 검색해서 요가 수업을 들어볼까나.
숙소는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고 내 방은 3층이라 문 밖의 뷰는 이랬다.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던 우붓의 풍경이라 '우와, 진짜로 우붓이네?' 했다. 붉은 지붕에 살짝 세월이 더해져 짙어진 빛깔 때문에 평범한 옆집 지붕도 마치 이국적인 유적지 같았다.
사원처럼 생긴 건물들과 숲이 우거진 듯한 길이 예뻐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흥분했는지 죄다 흔들려서 쓸만한 사진이 없다.
여동생한테 사진을 찍어 보낼 때마다 사진 좀 제대로 찍어봐. 이것보단 멋진 거 확실하지?라고 했었다. 그럼 그럼. 믿어달라는 듯 전화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아무리 봐도 멋진데? 사진이 그렇게 후진가?
'요가트리'라고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요가복 가게가 있는데 내가 있는 동안은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에만 문을 열었다. 한국에 납품하는 요가복을 싸게 판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가는 길에 원숭이가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
길리에 거북이가 있다면 우붓은 원숭이다.
길리에서 거북이를 봤을 때처럼, 우붓에선 '엥? 원숭이를 이렇게 본다고? 이렇게 길에 그냥 있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도로 위에 무리 지어 있거나 전깃줄을 타고 다녀 처음엔 "어? 어~어?" 했으나 한 이틀째부터 "너네냐......" 하다가 집에 올 때쯤엔 본 척 만 척하게 되었다. 저기, 길도 좁은데 좀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투덜투덜.
요가트리에선 하의 3개와 상의 4개를 샀다. 들어가서 언뜻 살펴보니 생각보단 그저 그래서(뭔가 우중충한 것이 옷가게 비주얼은 아니었다) 추천 좀 해달라고 했더니 옷 무더기를 가리키며 "한국인이지? 이거, 이거, 이거. 한국인들은 주로 이쪽에서 많이들 사. 찬드라야."라고 하셨다.
찬드라(아마도 요가복 브랜드인 듯)는 잘 모르지만 많이들 산다기에 그쪽 무더기에서 가장 무난한 걸로 골랐다. 나 많이 사니까 깎아주세요, 했더니 다른 한국인들은 10개씩 사 간다면서 한국에서 찬드라를 사는 것의 1/3 가격이야,라고 했다. 네, 그럼 그냥 살게요. 카드 되죠?(쭈굴)
전부 다 해서 15만 원이 안 되는 가격이라 확실히 나쁘진 않았다. 편안하고 촉감이 좋아 우붓에 있는 동안 아주 만족스럽게 입었다. 집에 돌아와 세탁을 해봐도 변형이 없길래 색깔별로 좀 더 사 올 걸, 하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다. (길리의 진주에서부터 시작된 껄무새)
요가반을 갈까, 래디언틀리를 갈까 고민하다가 숙소에서 더 가까운 래디언틀리로 갔다.
RA 빈야사. 우붓에서의 첫 요가수업이었다. 만약 길리에서 요가 수업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와, 발리에서 요가라니! 요가의 성지에서 요가를 하고 있다니...' 하며 엄청나게 감격스러워했을 텐데, 길리에서의 요가 수업이 너무 강렬해서 그랬던 걸까. 수업 자체는 특별하단 느낌이 없었다. 다만,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자세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세에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선생님과 다른 동작을 하며 자기만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선생님의 영어를 잘 못 알아들었나, 하며 당황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들 자신만의 요가를 하고 있었다. 요가 수업을 망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생님과 같은 동작을 했다가 스스로의 호흡에 맞는 다른 동작을 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멋지고 자유로워 보였다. 우와, 이런 게 요가구나, 역시 요가의 성지구나. 요가를 동영상으로만 배운 나는, 실전의 요가를 이곳에서 경험하게 되어 호흡이 가능한 만큼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요가임을 제대로 느꼈다.
요가트리 매장에서부터 입고 간 요가복. 다들 이 전신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기에 나도 찍었다. 저 옷은 나의 문신템이 된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우붓 거리
우붓 왕궁이랑 시장 근처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스치기만 했다. 도로는 아주 좁았고 사람은 너무 많았는데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싫었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냥 제대로 더 돌아보지 못해서 아쉬웠달까. 여행이 늘 그렇듯 집에 돌아와 이렇게 사진을 보니 아, 저기서 몇 걸음만 더 가볼걸, 싶은 아쉬움이 크다. (또 등장한 껄무새)
여동생의 선물로 라탄가방을 사고 아사이볼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 인터넷에서 분명히 아사이퀸의 아사이볼은 건강함과는 거리가 있는 천국의 맛이라고 했는데 내가 먹은 건 건강 그 자체였다. 먹자마자 어머나, 약인줄... 뭘 잘못 주문한 걸까... 왜 내 아사이볼은 건강했지, 궁금해하다가 잠들었다. 힝.
6. 우붓 둘째 날- 여행 5일째
그러니까 이 빨간 지붕은, 뭔가 십오 년 전 나 혼자 유럽여행 갔을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분명히 다른 풍경이고 다른 장소인데 뭔가 그때가 떠올라서 혼자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아침과 저 빨간 지붕을 바라보는 혼자만의 시간이 닮아 있었다.
숙소 풍경과 아침 식사.
저 조식을 포함해서 3.3만 원이었다. 다음이 있다면(있겠지? 있을 수 있을 거야. 있어야만 한다 ㅠㅠ) 그때도 이곳에 갈까 한다.
숙소에서 요가반을 가는 길에 저런 치낭사리를 백개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보았다. 정말이지 걸음걸음마다 있었다. 우붓은 원숭이와 치낭사리의 도시다.
요가반. 유튜브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요가 마을에 드디어 왔다.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며 우와, 우와, 진짜 요가반이네, 했다.
샤머니즘과 호흡 명상. 기대가 아주 컸던 수업이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어쩌면 내 영어가 짧은 탓에 수업을 못 따라가서 그런 건지도.
공간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 입장료라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었다...(라고 하기엔 5만 원이나 했네. 숙소가 3만 원인데... 히잉.)
수업 전 뽑았던 카드. 수용.
나는 모든 실망에 굴복합니다. 잊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이 열립니다... 어쩌고 저쩌고. 얼핏 보니 그런 말 같아서 몇몇 얼굴들이 카드의 문구처럼 시간의 물결의 타고 흘러왔다. 카드를 뽑을 때만 해도 기대감이 최고치였는데... 확실히 영어를 못 해서 그런지 이 수업은 끝내 온전히 와닿지 않았다.
명상수업이었으나 실제로는 영어 듣기 수업이었던 3시간 동안 기가 다 빨려버렸다. 가만히 누워있거나 조금 말을 한 후 고문당하듯(ㅠㅠ)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다리가 후들거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동굴 같은 푸르른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꽃들이 총총 놓인 계단이 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올라가면,
이런 뷰를 만날 수 있다. 오! 인터넷에서 보던 거랑 완전 똑같다.(계속 같은 감상)
가장 안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숲 속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구글 후기가 좋았던 스무디볼과 아보카도 토스트를 주문했다. 시원하고 예쁜 음식을 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우붓은 그냥 이렇게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끌리는 카페에 들어가 일기도 쓰고 책도 보기에 좋은 곳 같다. 숲을 품은 카페도 많고 메인도로를 벗어나면 아기자기한 골목길도 많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 좋다. 난 주로 요가원과 요가원 사이를 왔다 갔다 했을 뿐이지만, 다음에는(있어야 한다, 그 '다음'이란 것) 더 오래 머물며 하루 종일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소품샵도 구경하고 카페도 여기저기 들어가 보고 싶다.
계단 위의 꽃 장식. 아름다운 말.
우붓의 흔한 거리 풍경.
원숭이 한 마리를 찍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한 마리가 아니었네.
어제 갔던 래디언틀리 얼라이브.
숙소 근처라 3회 수업권을 샀었다. 아직 2회 수업이 남아 있어서 오후엔 여기서 모든 수업을 듣기로 했다. 가능한 수업이 인요가와 사운드힐링이었다. 오늘은 명상으로 시작하여 명상으로 끝나는 날인가 보다.
사운드 힐링 수업은 진짜로 후기가 너무 좋았던 수업인데 나한텐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명상+인 요가+ 또 명상'이라서 그랬던 거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에는(그래, 진짜로 오자. 이 정도면 또 와야 한다.) 빡센 요가 수업을 듣고 마지막에 사운드 힐링 수업을 들어봐야지, 다짐했다.
분명히 좋았는데, 마냥 좋다고 하기에 뭔가 애매한... 살짝 지루했던 느낌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영어 듣기에 지친 탓인 거 같다. ㅠㅠ
이렇게 우붓의 이틀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