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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기억’을 앞두고

by 날아라빌리

올해부터 5년 일기장을 쓰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매번 같은 패턴이긴 한데, '쓰기 시작했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다.


달력을 살펴보다가 벌써 12월이라 깜짝 놀라 일기장을 펼쳤다. 그동안 쓴 걸 살펴보니 확실히 1월~2월까진 열심히 썼는데, 3월에 몰아서 쓴 조급한 흔적을 뿌려대다가 4월부터 비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7월쯤에 띄엄띄엄 질문 같은 걸 던지더니 9월 이후로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일기장 속의 여백의 흐름을 가만히 떠올려 보니 그 속에 무어가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3월엔 일이 조금 바빴고 쓸데없는 고민과 분노가 종종 일었다. 4월엔 유예해 둔 대출 상환이 갑작스레 시작되어 돈걱정에 시달렸으며 감기를 오래 앓아 몸이 내내 좋지 않았다. 일은 5월까지 살짝 바빠서 이래저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5월부터 7월까지는 마음속이 지옥이었고, 7월부턴 약을 먹기 시작했다. 9월 즈음부터 브런치 연재를 시작했는데 멀티가 안 되는 인간이다 보니 그때부터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 같았다. 브런치 연재도 갑작스레 쓰고 싶은 글이 많아 일주일에 2번으로 했다가 현재 시점까지의 기록이 끝나자 내 호흡의 차도가 없는 것처럼 글의 진도도 나아가지 않고 있다.

이제 '12월의 기억'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데 과연 12월은 얼마나 채워질지 잘 모르겠다.


5년 일기는 참 이상하다. 같은 날을 두고 다른 해의 기록들이 쌓이면 재밌겠다,라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자꾸만 5년 후의 나를 의식하며 말을 걸고 있다.

- 나는 지금 51kg인데 5년 후의 너는 어떠니? 내가 여전히 이 몸무게야? 아니면, 드디어 살이 좀 빠졌을까?

- 나는 대출 상환이 시작되어서 하루하루 카드값에 시달리고 있어. 아, 현금이 아예 없거든. 어쩔 수 없이 카드로 살아. 배민으로 치킨을 시켜 먹을 때마다 엄청나게 고민을 하는데 너는 이제 괜찮니? 일주일에 하루라도 가성비를 따지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나는 지금도 늙고 병들었는데 너는 더 하겠지? 우울하진 않니?

- 나는 아직도 문장 하나를 손에 쥐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아. 한심해서 그냥 차라리 아무것도 안 쓰고 싶기도 해. 아무것도 안 쓰면 못 쓰는 일도, 한심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야. 너는 문장들을 잘 이어가고 있니? 여전히 쓰긴 해?

- 나는 숨 쉬는 일이 가끔씩 무서워. 호흡이 가쁜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해. 너는 이제 괜찮아?


일기장엔 이런 내용들뿐이다. 지루함과 우울함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 들 때, 아직은 그 기분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여 얼떨떨할 때. 그런 순간에 일기장을 펼쳐 한 두줄 끄적이곤 했더니, 아주 무난하거나 아주 우울한 순간은 일기장 속에 없다. 끄적인 내용들도 그저 5년 후의 나에게 무언가를 하소연하듯 던지는 질문들인데, 그 속엔 '5년 후엔 괜찮다, 모든 것이 다 끝나서 홀가분하다'는 바람이 가득하여 이건 일기라기 보단 그냥 소원카드를 매달아 놓는 나무 같은 느낌이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거나 작고 빛이 잘 드는 암자를 찾아가 기도라도 올려야 하나, 싶은 그런 마음.


12월을 앞둔 지금 내 마음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부터 답답하다는 기분이 들면 하루 종일 혼자 사막에 있는 느낌이다. 적막이 주는 막막함이 우울하여 고요함이 주는 평화를 찾게 되는데 그런 고요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일기장을 펴게 된다.

'오늘의 나는 사막을 걷고 있는데 너는 지금 어디니?' 이런 질문이나 던지고 있다.


뭔가 크게 바라는 건 없고, 12월엔 일기를 쓰고 싶다. 보통의 날이 담긴 '진짜' 일기. 그저 그런 잡담과 소소한 재미가 담긴 '진짜' 일기.

이를 테면 이런 거.

드디어, 오늘. 서브웨이 알바생의 난폭한 질문 공세를 이겨내고 주문에 성공하여 아보카도 키링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아싸! (키링 얻는 데에 실패한 어제의 나는, 또 미래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넌 이제 서브웨이에 가서 주문 좀 할 줄 아니? 나는 여전히 저 말이 한국말 같지가 않아. 플랫... 뭐라고? 어휴.)


12월에는 그런 일기가 쌓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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