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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16. 2022

'사랑해 누나'의 그 누나가 접니다

응답하라, 남편

유승준 노래 사랑해 누나를 기억하는지?

지금은 잊혀진 가수 유승준이 1997년도에 불러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노래다.

연하의 남자 친구가 연상의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말하는 댄스곡이자, 2011년도에 연하의 남자가 나에게 불러줬던 연가이다. 서정적인 멜로디는 아니지만. 게다가, 나를 향한 노래는 아니었다며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2011년도에 몇 년 만에 백수에서 탈출했다.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한다는 기쁨에 들떠 동기들과 자주 어울리며 술을 마셨고 마냥 행복하여 낄낄거리던 날들이었다. 그날은 2차로 노래방을 갔었다. 다들 잘 차려입고 다닐 때였는데 그 남자만 유독 무릎이 다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와선 뜬금없이 10년도 지난 노래를 화면에 띄웠다. 유승준, 사랑해 누나 

주위를 둘러봐도 그 남자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나뿐이라, '혹시 나?' 싶어 두근거리는 맘에 놀랬으나, 나는 누나니까(으른이니까) 동생의 재롱을 구경하는 으른의 표정으로 침착함을 유지한 채 '사랑해 누나'를 들었다. 노래는 사랑해 누나였는데 가위 춤을 냅따 춰버리는 건 그냥 못 본 척해줬다. 난 으른이니까.

 

그때 그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다.

지가 먼저 '사랑해 누나' 라고 해놓고 꽤나 뜸을 들이길래 '그래, 뭐 너 정도면...' 하는 맘으로 사귀자고 먼저 말해줬더니 싫다고 거절하는 거다.

허, 이 앞뒤 다른 놈 보소. 나이 서른 넘은 남자가 웬 내숭?

어차피 너라면 그냥 내가 먼저 사귀자고 해야지, 하며 고백하였던 건데 결국은 너라서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여기서부턴 남편은 내내 '싫다'고 했고, 나는 계속 '누나가 행복하게 해 줄게'라는 말과 함께 했던 긴 설득이 이어진다. 지구 여자 다 사귀어도 나랑은 절대 안 사귈 거라 했던 거절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화나지만 누나라서 못 들은 척했다. 지구 여자들이 너랑 왜 사귀니? 나니까 너랑 사귀지, 라는 말은 여전히 하지 않고 있다. 사랑해 누나의 그 누나가 바로 나니까.


만날 때마다 사촌 형아의 여친이 바뀌는 걸 목격한 아들이 요즘 들어 부쩍 여친과 남친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졌는지 "엄마랑 아빠는 누가 먼저 고백했어?"라고 물어왔다. 재빨리 남편을 째려보니 눈치라는 것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는지 "아빠가."라고 짧게 대답한다. 별빛이 흐르는 아름답고 긴 서사를 얘기해주길 바랬으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아빠가"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며칠째 곰곰이 생각해봤다. 남편이 나한테 언제 고백했는지. 이 정도는 대신해줘야 누나지요. 암요!   


나의 시작을 먼저 더듬어 봤다. 나는 언제가 시작이었지?

대부분의 시작이 그러하듯 나의 시작도 그리 거창하진 않다.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남자 괜찮네, 정도의 호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뭔가 이상하네. 근데 좀 귀엽네?! 였달까.

시작이 거창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물 흐르듯 뭔가가 흘~러 흘~러 밤하늘에 흐르고 있는 것이 별빛인지 달빛인지 가로등 불빛인지. 아무리 올려다봐도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스며들듯 뒤섞어 있어 실은 그 시작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며칠 째 굳이, 굳이, 굳이, 생각해보니 그 노래방에서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랑해 누나.

사실 그 노래를 듣던 당시엔 저 자식이 지금 나 나이 많다고 맥이나? 싶어 미간이 조금 꿈틀거렸던가. 암튼 그때 그 누나가 나라서 그 후로는 남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내가 며칠 동안 고심하다가 간신히 찾아낸 아주 사소한 우리의 시작이다.

그렇게나 사소했던 시작이 나를 지금 이 순간까지 데려왔구나 싶지만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면 마냥 사소하기만 했던 것도 아닌 듯하다. 때때로 어떤 사소함의 이면에 거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함께 할 때가 있으니까. '사랑해 누나'의 누나가 실은 내가 아님을 알지만,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잖아? 하며 손에 쥐어보고 싶어지는 그런 종류의 사소함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사랑해 누나의 그 누나가 말한다.

앞으로 아들이 누가 먼저 고백했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빠다. 그때 아빠는 예쁜 누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릎이 다 튀어나온 후진 트레이닝복을 입고서 이상한 가위춤을 춰가며 사랑해 누나라고 고백하였다. 별빛 대신 노래방 조명이 흐르고 있던 것이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엄마는 그런 아빠가 조금 귀여워 며칠 고민하다가 받아줬다는 것이 우리의 시작이니 잘 기억하도록!


그리고, 사랑해 누나의 그 누나가 묻는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던 누나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는지? 누나는 행복한데, 너는 행복한지?


응답하라,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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