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끄덕임
심플하게 산다
딱 1년만 옷 안 사고 살아보기
사지 않는 생활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즐겁게 시작하는 제로웨이스트 라이프)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거실 바닥에 엎드려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다이어리에 적고 있으려니 또 뭐 하나 싶었는지 남편이 어깨너머로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편의, 이런 시선이, 참 좋다.
내가 뭔가 하고 있을 때 궁금해하며 기웃거리는 시선. 나를 향해 내밀어지는 어깨.
그 기울어진 시선과 어깨의 주인공이 남편이라서, 내가 어쩌면 꽤나 근사한 여자구나, 하고 안심하며 설렌다.
남편을 향해 몸을 일으켜 "이거 내가 읽고 싶은 책이야" 하며 적고 있던 책의 목록을 읽어줬다.
요즘 관심 가는 책들인데 이런 삶을 지향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이 책들을 돈 주고 사면 좀 이상하겠지?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했더니, 그렇게 당연한 걸 왜 묻냐, 하고 대꾸한다.
결혼 초에는 이런 말들이 너무 무뚝뚝하고 시큰둥하게 느껴졌었다. 울컥- 밀려드는 서운함에 자주 다퉜지만(주로 내가 싸움을 걸었다) 이제는 이런 대답이 아주 사소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고 호응해 주기 위함이라는 걸 알고 있다.
직장에서 화가 잔뜩 난 채로 돌아와 사람들 욕을 쏟아낼 때도 응응, 그래그래, 끄덕끄덕
낮부터 혼자 맥주를 마시며 신이 난 채로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도 응응, 그래그래, 끄덕끄덕
같이 티브이를 보다 갑자기 혼자 훌쩍거려도 응응, 그래그래, 끄덕끄덕
남편의 끄덕임이 멈춰지는 순간은 내가 아이에게 감정을 쏟아낼 때뿐이다. 아이한테만큼은 옥타브를 넘나들며 좋아 죽거나 폭주하지 말고 제발 무난하게 일정 톤(솔톤 정도?)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한다.
남편의 주장대로 내가 AB형이라 그런 것인진 몰라도, 나는 확실히 감정의 진폭이 심한 편이며 같은 감정이라도 그 흐름과 결이 일정하지 않아 갑작스럽다. 밖에선 최대한 고요함을 가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그 울림과 여진이 폭풍처럼 집 안으로 밀려들곤 한다. 날것 그대로의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너울성 파도가 따로 없다. 대체로 천하태평인 남편은 자주 너울대는 나 때문에 아주 무난하고 무해한 끄덕임을 선택하여 의사표시를 하며 '아하'라든지 '오호'라는 중립적인 감탄사를 사용한다. 가끔씩 지루해지면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는 이유는 뭐지?' 라며 딴지를 걸긴 하지만 그나마도 내 미간의 폭을 살피며 다시 재빠르게 '아하' 혹은 '오호'로 돌아간다.
이것저것 쏟아내며 바쁘게 오르내리는 나에 비해 단출하기만 한 그 반응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좋다고 해도 시큰둥, 싫다고 해도 시큰둥하여 '내 울림에 대한 반응이 고작 그거야?' 하는 서운함이 꽤나 컸었다.
함께 한 시간들 속에 '이런 순간엔 이렇게 끄덕였지, 저런 순간엔 아하!라고 했을 걸.' 하는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이제는 오호!라고 할지도...' 하는 예측이 가능해질 때쯤, 사실 남편은 오래전부터 나의 소소한 말과 작은 파동까지도 놓치지 않고 '아하' 혹은 '오호'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가끔은 거칠게 울렁이던 마음들이 남편의 끄덕임에 잦아들곤 한다.
(남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진짜다. 그게 최대한 고요해진 포효인 것이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정리하는 나를 넘겨다보며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하는 내 말에 아하,라고 대꾸하다가 그건 좀 당연한 소리 아닌가? 하며 슬며시 퐁당거리기도 하는 남편을 보고 있으려니 한결같은 그 끄덕임과 그 속에 품고 있는 마음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저 사람 옆에는 잔잔하게 반짝이는 우아한 윤슬이 어울리겠다, 싶지만 이미 그 자리엔 이러한 내가 있으니 너무 우악스럽지 않게 그저 때때로 자그마하게 조로롱하는 소리는 어떨까 꿈꿔 본다. 적당한 일렁임으로 아롱다롱 방울지고 싶은데 생각하다가, 오늘도 그 어깨는 나를 향해 가만히 기울어져 있어 나는 또 아무 말이나 기분대로 떠들고 만다.
아무래도 잔잔함은, 오늘도 텄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