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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an 08. 2023

파이의 부스러기를 찾아서

2023년은 달라질 거야

겨울방학이 시작된 아들을 위해 남편이 접시를 뒤집어(라떼는 컴퍼스로 동그라미를 그렸던 것 같은데 집에 컴퍼스가 없어 접시를 뒤집었다) 커다란 동그라미 모양의 파이를 그렸다.

파이를 정성스럽게 조각낸 후 몇 시부터 몇 시까진 무얼 하고, 또 몇 시부터 몇 시까진 무얼 하고, 이 정도 시간쯤에 양치하고 잠을 자야지,라고 중얼거리며 조각난 파이 안을 이리저리 채워 넣었다.

파이 조각을 끝낸 후 아들에게 물었다.

"어때? 이 정도면 지킬 수 있겠어? 일단 정해지면 지켜야 하니까 못 할 것 같으면 지금 말해. "

"그럼 나는 언제 놀아?"

"여기에 자유시간이 있잖아. 이때 놀면 돼. 자유시간 많잖아."

'이 자식아! 그럼 네가 내내 놀지, 일이라도 하냐? 어차피 안 지킬 거잖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들의 파이를 조각내는 김에 나의 파이도 이리저리 조각내었다.
그렇지만, 내 파이를 조각내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대충 두 조각을 낸 다음 한쪽에는 [집]이라고 쓰고 또 한쪽에는 [회사]라고 썼더니 끝나버렸다.

'아, 좀 시시한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의 파이가 실제로 그렇게 집약적이고 단순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곤 새로운 다이어리를 펼쳐 작년 다이어리에서 필요한 내용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는데 습관적으로 제일 첫 페이지에 '승진순위'를 적고 있었다. 근평 시기마다 승진순위가 발표되고 있었고 그 그래프의 기울기와 움직임의 정도가 꽤나 중요한 건 사실이었다. 한번 발표되면 그 시기만 볼 수 있고 다시 열람이 불가하여 대부분 업무수첩이나 다이어리, 휴대폰 메모장에 승진 순위를 기록해 둔다. 그렇지만 2023년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에 승진순위를?

그 필요성에 대해선 확실하게 인정하는 바이나 첫 페이지에 적기엔 묘하게 자존심 상했다.


나한테 중요한 게 이거밖에 없나? 그건 아니잖아? 누가 볼까 수치스러워(볼 사람도 없지만) 얼른 수정테이프로 지워버리고 뭘 먼저 적을까,를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후다닥 2022년에 읽었던 책의 목록을 적었다.

2023년 읽고 싶은 책을 적은 것도 아니고 2022년에 읽었던 책의 목록을 적은 것을 보면 일단 승진순위를 가장 첫 페이지에 적었던 것이 꽤나 충격적이어서 얼른 덮어버리고자 했던 것이 틀림없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있는 건가, 하는 위기감에 깜짝  놀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올해는 파이의 부스러기를 찾는 해로 정했다.  

커다란 파이를 두 조각낼 때 아주 사소하면서도 소박하게 떨어져 나왔던 그 부스러기들. 올해는 그 부스러기들을 좀 찾아야겠다. 아직 이런 수치심이 남아 있어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허세이고 허영일수도 있겠지만 2023년은 '아무튼 부스러기'의 해다.

급하게 적어본 부스러기들

올해는 꼭 스탠딩스플릿을 해보고 싶고 아들과 함께 바이올린도 배우고 싶다.  

어떤 글을 써서 브런치북을 엮어야 할진 아직 모르겠지만 얼마 전 불쑥 떠올랐던 그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기도 하고 주변인들과 함께 하는 요일들에 대한 이야기도 써보고 싶다.  

부스러기들이 '이제 와서 왜 친한 척 이래?' 하며 비협조적으로 나올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내가 파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부스러기라는 것을 그들이 꼭 눈치채줬으면 한다.(이봐, 몰라주면 섭섭하다고?!)  

우리 함께 똘똘 뭉쳐 커다랗고 맛있는 새로운 파이 하나를 만들어내자며, 나와 내 파이의 부스러기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쳐본다.

2023년! 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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