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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25. 2022

밀키트로 완성한 크리스마스

스테이크 써는 저녁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밀키트를 구입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작년에 이어 2년째 창고에 처박혀 있는 중인데 올해는 꺼내려했으나 막상 꺼내려니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없고 곧 크리스마스가 끝나는데 뭐... 하다 보니 어영부영 지나가고 있어서 우리 집엔 크리스마스나 연말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고 있다. 음식이라도 뭔가 준비해볼까 싶어 공들여 리뷰를 검색한 후 밀키트를 주문했다.

요리할 시간은 없을 듯하고...... 는 핑계고, 사실 맛이 없을 듯하여(나는 요리를 정말로 못 한다) 특별한 날에 괜히 요리한답시고 나섰다가 만든 사람이나 먹는 사람 모두 치열한 눈치 싸움으로 피곤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식재료를 사봤자 주말에만 요리를 하니 남은 재료를 썩힐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나가서 먹기엔 갑자기 떨어진 기온도 맘에 걸리고 비싸기만  식당에 사람도 많을 듯하여 고민 끝에 밀키트를 주문한 것이다.


주문과 동시에 남편에게 통보했다.


감탄사가 끝이었다. 내가 화내지 않을 답변을 생각했겠지만 재빨리 떠오르지 않아 좀 더 고심하다가 결국 답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밀키트를 싫어한다. 3분 짜장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다. 가끔씩 내가 주문한 밀키트의 택배박스가 도착하면 3분 짜장주제에 왜 이런 가격이지? 하는 표정으로 나와 밀키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지만 "어! 지금 하고 싶은 말, 그거! 그건 절대 하지 마"라며 매번 미리 입을 막아버린다.

그런 남편을 위해 30분 정도 시간을 주고 기다렸다. 좀 있다가 다시 하지 말까 물어보니 "ㅋㅋ 집에서 먹는 거?"라고 대답한다.

'ㅋㅋ'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의미일 테고(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현명함) '집에서 먹는 거냐'는 당연한 질문으로 상황을 재확인하는 걸 보니 맘에 들지 않지만 니 맘대로 해,라고 하는 거 같아서 "오키"라고 답하며 주문을 확정 지었다.


밀키트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배달되었다.

요즘 밀키트는 정말 잘 나온다. 재료도 잘 손질되어 있고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있어 음식쓰레기도 거의 없다. 다만, 포장이 과해서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는 많다.(이건 좀 어떻게 개선될 수 없나? 늘 생각한다.)

재료 상태도 아주 좋았다. 고기가 두툼하고 선홍빛이었는데 사진은....... 내가 잘 못 찍어서 그렇다. (뭔가 예따, 인증! 이런 느낌의 사진이네?) 


나는 봉골레빠네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편은 내가 미리 시즈닝 해둔 고기를 구웠다.   

남편은 여전히 밀키트 맘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스테이크를 굽고 있으려니 뭔가 크리스마스 같다는 말을 하면서 아들에게 "아빠는 어릴 때 스테이크가 뭔지도 몰랐어. 돈가스도 1년에 한 번 겨우 먹을까 말까였는데......" 하는 말로 라떼 시전을 잊지 않았다.  

아들은 빠네파스타가 맘에 들었는지 빵뚜껑을 덮었다, 열었다 하며 르르 웃었고, 아빠가 라떼를 시전 하며 구워준 스테이크를 서툰 칼질로 썰면서 자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달라고 했다.  

조그만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맛있냐고 몇 번을 물었는데 맛있다며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플레이팅따위 없는 10년차 현실 부부

아들이 태권도장 행사로 없던 밤 내가 씻는 동안 남편이 감바스를 만들어놓았다. 파스타면까지 삶아놔서 와인과 함께 감바스를 맛있게 먹은 후 오일파스타까지 잘 먹었다.

어제 먹던 와인은 향이 조금 날아가서 맛이 덜 했고, 설거지 거리를 줄이기 위해 프라이팬 그대로 아들의 놀이탁자 위로 옮겨와 먹다 보니 그럴듯한 분위기는 없었지만, 내겐 더없이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작년엔 이런 기억조차 없었는데 올해는 아들에게 스테이크도 구워줬고 감바스도 만들어 와인과 함께 먹었다. 기억이란 어차피 조금은 미화되기 마련이니 밀키트는 쏙 빠지고 고기를 굽던 버터향과 맛있는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다.

아들의 추억 속에도 엄마는 맨날 바쁘단 소리만 하면서 크리스마스트리도 안 꺼내어 올해도 우리 집은 산타가 오지 않았다,라는 기억보단 크리스마스 때 엄마랑 아빠가 나란히 부엌에 서서 저녁을 만들었던 풍경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엄마는 빵 속을 파내어 크림파스타를 넣어줬고 아빠는 스테이크를 구워 먹기 좋게 잘라줬고 식탁 위엔 고소한 버터향이 가득했다고.

언제나 핑계만 가득하고 요리는 늘 망쳐서 눈치 보게 만드는 엄마지만 마음만은 맛있는 향기와 풍성한 식감이 가득한 사랑을 주고 싶었음을 아들이 꼭 기억해줬으면 한다.

우리 가족, 올해도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밀키트야, 너무 고마워!! 정말이지 늘 함께 하자.(소곤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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