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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n 02. 2021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

 본명과 필명으로 활동했던 '로맹 가리'이면서 '에밀 아자르'였던 법학도이면서, 군인이자, 파일럿이었고, 소설가였던 한 남자의 글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소설은 어떻게 해야 적을 수 있을까요.


 사실 한 주에 한두어 권 읽는 취미형 주말 독자 차원에서 엄청난 양의 책을 탐독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다른 글들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 소설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의 세계를,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을 창조하고 그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 그리고 성장을 적어나간 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무게감이 있었고, 그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라는 이야기 장르의 특성에 맞게 눈을 떼는 시간 거의 없이 다음 페이지를 다시금 넘기고 있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후 프랑스 어느 골목,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이 끝난 어디 서울 한 구석의 빈촌이지 않을까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사정이 있는 편모의 아이들을 보수를 받고 길러주는 사연 있는 할머니와 거기서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그중 한 아이의 시점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는 새 십 대 중반이 되어 있을 때까지 자기가 보아온, 배워온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 앞의 생'을 적어놓은 글입니다.


 처음에 번역서 제목을 보았을 때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 인지 전혀 추측할 수 없었습니다. 첫 페이지에 아이와 아줌마가 등장할 때도 제목의 '생'이 '生'이 아니라 불어의 'Saint'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La vie devant soi, 영어로 보면 The life in front of myself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내 앞에 펼쳐진 나의 인생이라기보다는, 내 눈앞에서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인생을 의미하는 것 같은 글입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과, 애착, 정, 사랑, 오해, 그리고 죽음과 이별까지. 다양한 감정을 아주 미묘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불어를 몇 자라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이 섬세한 감정을 직접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 봅니다.


 삶이라는 단어는 살아있음, 살아가는 과정의 느낌이 있다면, 생이라는 글자는 전체를 조망해서 간결하게 살펴보는, 무언가 지나서 되돌아보는 뉘앙스가 짙게 느껴집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삶보다는 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인공 꼬마도 꼬마일 때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다 지나간 후 그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삶은 내가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듯한 생각이 드는데, 생은 무언가 주어진 것 같지 않나요? 이 책에서는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어쨌든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생을 겪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나이와 환경을 불문하고, 잠시 멈추어 서서 본인이나, 아니면 주변에 돌아보고 싶은 생이 있다면, '이렇게 섬세하게 인생의 한 순간순간을 느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기에 좋은 시간일 것 같습니다.




10. 내가 몹시 슬퍼하는 것을 보고 로자 아줌마는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나무에 묶어두고 바캉스를 떠나는 가족도 많고, 해마다 그런 식으로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죽어가는 개가 삼천 마리씩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59. 몸 파는 여자들도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 손님들보다도 만날 기회는 드물지만, 아이들은 그녀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60. 그녀는 또, 어쩌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도 했는데, 사람이 돈 한 푼 없이 궁지에 빠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다 똑같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63.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이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믿게 되고, 또 살아가는 데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 같다.


72.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99.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103.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120. 조무래기일 땐, 뭐라도 된 것 같으려면 여럿이어야 하는 법이니.


144. 나는 아슬아슬하게 차들 사이를 달리면서 그들을 겁주는 게 재밌었다. 운전자들은 어린아이를 칠까 봐 두려워했고, 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무엇인가 하게 한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무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161. 그건 그저 병일뿐이고 병에는 책임이 없으니까. 나는 때로 콜레라를 변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콜레라가 그렇게 무서운 병이 된 것은 콜레라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콜레라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콜레라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콜레라가 된 것이니까.


168. 로자 아줌마는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에게 친절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279.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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