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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l 04. 2021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2001년, 20년 전 40대 여성의 삶 그리고 사랑

 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책장에 책을 훑어보는데,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새로 산 책도 없고, 빌려다 놓은 책도 없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사실 요즘의 독서는 '읽는 시간' 자체에 몰입하기 위한, 즉 '독서를 위한 독서'이다 보니, 어떤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는 큰 그림이나 특별한 목표는 없습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책 중에 손이 가는 것을 먼저 보고, 그냥 있는 책을 집어 들고, 눈앞에 텍스트를 읽으면서, 복잡하기만 한 '내 머릿속'을 떠나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죠.


 지금 집어 들 수 있는 모든 책들은 다 읽었고, 당장 다른 텍스트를 구할 수 없을 때, 책장 한쪽 구석에서 이 두 권짜리 소설을 발견했습니다. 딱 20년 전인 2001년에 발간된 글입니다. 2001년이 벌써 20년이나 지났다는 것은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지만, 노릇하게 변색되어 있는 페이지를 넘겨보다 보니 흘러간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작가 김형경 님은 60년생이라고 책 좌측 날개 소개에 적혀있었습니다. 2001년이면 40대 초반이었을 것이고, 이 책이 본격적으로 작성되었던 것은 9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30대 후반, 40대 초반 주연, 조연 여성들은 작가님의 삶과 생각을 투영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두 권짜리 장편소설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쓰인 글을 볼 때면 '응답하라'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삐삐'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작품. 옛 것을 이야기하는데 별도의 설명이 없는 문장. 은근히 마음이 편해지곤 합니다. 저도 마흔 줄에 접어든 입장에서 20년 전 40대 초반의 삶을 엿본다는 것이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저랬던 것인지, 작가의 표현이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대화가 '대화 같지 않아 보일 정도'로 복잡하긴 했습니다. 20년 전의 어른들의 구어가 그랬던 것일까요. 20년 전의 제가 어리숙해서 이런 사회를 모르고 커왔던 것일까요. 그리고 20년이나 지났지만 제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탓일까요. 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작품이어서 그런지 어느 순간에는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인문학 서적을 읽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딱히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좋기만 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소설은 예전에 친구였다가, 아니었다가, 지금은 관계가 애매한 두 여성을 중심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각기 전개됩니다. 사인(Sin) 곡선과 코사인(Cos) 곡선처럼 잠시 이야기가 겹쳤다가, 떨어졌다가 반복하지만 전반적인 이야기는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죠. 여성 작가가 적어 내려 간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그들의 입장'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 읽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를 권력관계로만 접근하고, 성적인 부분에 일상 수준 이상으로 과하게 집중하고,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는 다 결함이 있거나 의존적인 인물이고, 같은 이야기를 빙빙 돌려 복잡하게만 접근하는 것들 때문이죠. 몇 주 전에 읽었던 '모순'이라는 작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책은 두 권짜리라 그런지 그런 느낌이 대략 두배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적인 고민이 담긴 내용은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물론 텍스트북이나 인문학 서적이 아니다 보니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작가의 한쪽으로 치우쳐진 의견 위주로 담겨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읽어야겠지만, 근 20년 전 학교 '심리학 개론' 시간에 들었던 것들, 그 당시 읽었던 책들에서 보았던 단어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당시 기억을 되새겨보고, 다시 찾아보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이 책에서는 '세진'의 정신분석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많이 다루어졌는데,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지만 '일렉트라 콤플렉스'이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프로이트나 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찾아보고 하는 과정이 주말에 어울리는 독서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도 그간 제가 놓치고 있었던 '제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단,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이 텍스트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어진 내용만 가지고 심리학을 이해하는 것은 비약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알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겠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내가 어찌어찌해볼 수 있다면 그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죠. 매일매일이 더 힘들도 어려워만지는 요즘,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면서 '나도 지금 마음의 병이 든 것이 아닐까'라는 진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세진'이 책 내용 근 절반에 걸쳐서 정신과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나도 한번 이러한 진료를 받아보는 것을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20년 전이면 이런 진료에 대해서 더욱 편견이 있었을 텐데, 남녀 갈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정신 건강에 대한 간접경험이라는 차원에서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약간 삐딱한 시각으로 읽어서 그런지 책 제목에 나와있는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찾지 못했습니다. 제 눈에는 폭풍 같은 한 해를 보낸 40대 초반의 두 여주인공이 결국 지금의 삶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 소설이 막을 내렸습니다. 과거에 얽매여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 같은 그녀들의 삶은, 지금까지 바라보지 못했던 다른 방향으로 발을 떼면서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인 도피가 삶의 답은 아니겠지만, '죽을 것만 같으면 이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1권


11. 이제 광고는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권력을 팔았다. 소비자가 왕이고 소비 행위가 권력 행사라고 부추기는 것을 넘어 권력에 대한 환상까지 팔았다. 이 상품을 소비하기만 하면 당신은 매혹적으로, 부자로, 자유롭고, 힘 있게...


21. 한눈에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유심히 보면 눈 밑에 깃든 반달 그늘, 미간에 선 두 줄 세로 주름, 입꼬리 옆으로 처지기 시작하는 살집 같은 것들이 선연히 잡히기도 했다.


30 "그렇다면, 남성을 오직 저 위에서 드리워진 동아줄 같은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그 남성이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고유한 감정은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36. "그들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면서도 독신 여성의 오류에 대해서만 유독 손가락을 세워 가리킨다는 거죠."


47. 인혜는 자신의 행동이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 적극적인 친절일 수도 있고 소극적인 유혹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인혜는 그 양쪽 가능성을 다 열어 두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쪽이 되든 그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었다.


91. "사랑을 주기는 주는데, 쓸 수 없게 주는 거죠. 엉뚱하게."


101. 답답한 것은 문제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02. "저는 슬픈 얼굴, 반항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의심이 가요. 제임스 딘 같은 사람, 그게 다 위장이거나 생존 전략이라는 거죠."


110. "둑까지 차서 찰랑거리는데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중략) 몸 안의 슬픔이 자기를 알아 달라고 몸을 아프게 하는 겁니다."


115. 때로는 5분, 10분쯤 침묵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면 면담자는 때로는 내 침묵을 존중해서 조용히 있기도 했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얘기를 시작하면서 내 얘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면담자의 얘기에 반응하면서 겨우겨우 따라가다 보면 그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192. "텔레비전에 나와 숨도 쉬지 않고 일장 연설하는 사람들 있죠? 그 사람들 내가 보기에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 분노가 방어 의식으로 표현되죠. 말 너무 많이 하는 것, 말 별로 안 하는 것, 다 방어 의식이에요. 다른 사람의 결함을 잘 집어내는 비판 의식, 혹은 저 사람이 사기꾼인가 아닌가를 잘 알아맞히는 능력, 모두 방어 의식이죠."


194. 그리고 내 인간관계라는 것은 늘 상대방이 더 적극적으로 챙기는 관계만이 살아남는다.


213.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노이로제이고,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를 입는 게 콤플렉스이듯, 그 사람이 선택하는 단어가 그 당사자의 상처였다. 그러고 보니 몇 가지 사례가 떠올랐다. 늘 '귀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무료하다'는 단어를 많이 쓰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바로 그 단어가 상처이겠구나 싶었다.


226. "아무튼 일상이 헝클어진다는 건 좋은 징조예요. 물이 끓고 있다는 뜻이지요."


227. "아니죠.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 퍼센트예요. 그렇지만 오 퍼센트만 달라져도 살기가 한결 수월하죠."


243. 그가 했던 말 중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다. 나도 자존심 강하고 나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인데, 넌 왜 이렇게 나를 초라하게 만드느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게서 등을 돌리지 못하는 그가 더 가슴 아팠다. 그 관계가 지속된다면 나는 틀림없이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말 것 같았다.


261. "내가 지금 네게 음식을 덜어 주는 행위도, 좀 전에 네게 선물을 준 행위도 다 같은 의미야. 내가 이만한 애정을 너에게 주니, 너도 나를 좀 사랑해 줄래? 그런 뜻이더라. 더 냉정하게 말하면 나는 선물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애정을 구걸하고 있었던 거야."


266. "영선 씨 턱과 오른쪽 안면이 마비되는 그 증세는 일 욕심이 많아서 생기는 거예요. 마음에서 욕심을 삼분의 일만 덜어 내도 증상이 많이 완화될 거예요."


288. "그래서 광고에도 늘 모델을 사용하죠. 뷰티, 비스트, 베이비. 사람의 시선을 끄는 삼대 모델이라고 해요."


294. "잡힌 토끼라는 건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습니다."




2권


54. 그 자존심이 곧 열등감이었음을 이제는 명백히 알겠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걷어 낼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풀어내야 한다는 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성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감정은 분노를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59. 노출증 환자의 무의식에 있는 진정한 욕망은 관음증이고, 자살자의 내밀한 욕망은 누군가에 대한 살해 욕망이다. 


61. 이제 문제는 온전히 내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63.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며 언행에서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남자. 그런 남자들의 내면에는 의외로 소심한 겁쟁이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외모에 신경 쓰는 댄디한 스타일. 스런 사람은 대체로 짠돌이일 경우가 많았다. 감수성 풍부한 눈매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 그들은 철없는 로맨티스트일 확률이 높았다. 머슴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도 있었다. 외모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비교적 이타적이며, 상대에게 무엇이든 해줄 준비가 된 듯한 남자.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집안에서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최고의 가부장일 경우도 있었다. 연애를 할 때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근육질은 근육질대로, 신경질은 신경질대로 나름대로 서로 다른 맛이 있으니까. 그러나 결혼을 염두에 두자 인혜는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133.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유도하는 버릇은 명백히, 내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한 딴청이었다.


165. 그동안 타인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비판했던 모든 일들이 우스워졌다. 결국 내 얘기를 했을 뿐이었구나.


169. 외할머니의 결핍이 엄마의 결핍을 만들고, 엄마의 결핍은 나의 결핍을 만들었구나 싶은, 결핍과 욕망의 대물림이 읽히는 듯했다.


179. 그런데 엄마를 만난 순간부터 내 가슴 한 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210. "자기, 그 권력 타령 좀 그만 해. 귀에서 피고름 날 지경이야."


221. "본인은 사심 없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이미 사심이 없지 않다는 거죠. 사심 없이 좋다고 느끼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이미 결핍과 욕망의 기제가 작용했을 거라는 게 박정연 씨의 주장인 것 같아요."


240. "내가 네게는 자기중심적으로 굴기도 했어. 다른 데서는 이타적이고 배려가 많은 사람처럼 행동하고는, 그 반대 감정은 가까운 사람에게 풀었더라. 미안해. 혹시 그밖에도 내가 네게 서운하게 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너를 그만큼 믿었다는 의미로 이해해 줄래? 싸우지 않는 부부들은 문제가 많고 싸우는 부부들이 더 잘 산다는 말 있지? 그거 이해하게 되었어. 분도가 표현되어야만 사랑도 표현되는 거였어.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도 하지 않아."


248. '실제로 현대 생활의 복잡한 사건에 대처라기 위해서는 페르소나가 유용하며 필수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매우 해로울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 페르소나가 진정한 자기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 역할자 자체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자아는 오직 페르소나와만 동일시되어 성격의 다른 국면들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은 결국 진정한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팽창한 페르소나와 축소된 다른 성격의 국면들 사이에서 긴장을 초래하게 된다. 이 현상은 심리적 건강을 방해한다."


249. '물론 모든 역할이 다 속임수이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건강한 사람은 타인을 속이는 데 반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는 점이다.'


252. '윤리적으로 엄격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조사하면 그들이 어린 시절에 자주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에 어떠한 식으로든 반복적으로 부당한 대우와 굴욕을 받으며 자란 어린이는 결과적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복수를 꾀한다고 한다. 그 복수가 정당할 수 있으려면 세상이 부도덕해야 한다. 세상이 친절하면 거기에 복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부도덕한 시궁창이어도 끝끝내 도덕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복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소중한 조건인 것이다.'


272.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명제도 이해했어요. 자기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고 용인하게 되니까 타인의 그런 점에 대해서 관대해질 수밖에 없어요."


300. 새해가 되면서 오여사들 중에는 마흔이 되는 사람이 둘, 서른아홉이 되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들은 다들, 살면 살수록 살기가 더 어렵다고 말했다. 어느 만큼 살면 사는 데 이력이 붙어 나중에는 인생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절로 굴러가는 줄 알았어. 그래서 빨리 나이 먹기를 바랐는데 그게 아닌가 봐. 살면 살수록 사는 게 점점 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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