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루함과 실패를 허락하는 용기에 대하여 -
새로운 병원에서 약을 바꾸기로 결정한 날,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약은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다.
얕은 수면 속에서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졌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헛것이 보였고, 그 공포를 이겨내려다 내 비명 소리에 놀라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작은방에서 아기와 함께 자고 있던 남편이 화들짝 놀라 괜찮으냐고 물었다.
"가위눌린 것처럼 이상한 꿈을 꿨어. 약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다음 날 오전, 병원 오픈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담당 주치의는 휴진이었지만, 다른 원장님을 통해 '약 중 한 가지 성분의 부작용일 수 있으니 분홍색 약은 빼고 먹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지시대로 분홍색 약을 중단했지만, 다음 주 진료를 볼 때까지 하루에 고작 2~3시간의 선잠을 자며 버텨야 했다. 몸이 적응할 무렵에야 겨우 4~5시간을 잘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얕은 꿈속을 헤매는 피로한 수면이었다.
일주일 후 다시 진료를 받고 결국 예전에 먹던 약으로 돌아갔다. 맞는 약의 종류와 용량을 찾아가면서 내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이 요동치는 동안, 전보다 더 심한 졸음과 싸워야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무기력에 몸을 맡겨야 했다.
간호사로서 약물의 부작용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전은 달랐다. 약 기운이 온몸을 누르는 오후면, 아이의 "엄마, 이거 봐!" 하는 외침조차 아득하게 들렸다. 아이와 놀아줘야 한다는 의무감과 천근만근인 몸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약 때문에 '절전 모드'가 될 때마다, 아이는 예민하게 그 기류를 읽어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내 얼굴을 가만히 살피기도 하고 평소보다 더 보채기도 했다. 엄마의 변화는 곧 아이의 세상이 흔들리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이사 후 남편이 4개월간 육아휴직을 낸 상태라 내가 한계에 부딪힐 때면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무기력의 시간은 나에게 '육아의 기조'를 다시 세우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이를 재우고 멍하니 누워 있을 때면, 거실에 쌓여 있는 집안일과 어질러진 장난감들이 눈에 밟혀 마음이 몹시 불안했다.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집을 가만히 견디는 것은 내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 지독한 강박의 뿌리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정엄마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방임했고, 어린 시절 머물던 집은 늘 어지러웠고 더러웠다. 그 공간은 내게 '돌봄 받지 못한 아이', '버려진 아이'라는 뼈아픈 상징이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우리 집은 절대 더러우면 안 돼', '나는 절대 우리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완벽하게 청소하려 내 몸을 혹사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한 몸을 뉘인 채 낡은 강박의 사슬을 조금씩 내려놓기로 했다. '아이가 있는 집이니 어질러지는 게 당연한 거지 뭐.'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에 모든 집안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버렸다. 오늘은 안방만, 내일은 밀린 빨래만. 몸이 힘든 주에는 일주일에 하루 날을 잡아 몰아서 정리하는 식으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타협했다.
신체적 에너지가 바닥나니, 아이와 노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외동인 아이는 혼자 노는 건 재미없다며 쉼 없이 나를 졸라댔다. 처음엔 아이가 나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게 기뻤지만, 벅찬 몸으로 그 요구를 다 채워주지 못할 때면 악마의 속삭임처럼 짙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이를 지루하게 만들면 아이에게 미움받을까 봐 겁을 내는 내 자신이 싫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아이의 모든 심심함을 엄마가 채워주는 것이 과연 옳은 육아일까?
육아의 가장 큰 목적은 결국 아이의 '성숙'과 '독립'이다. 그렇다면 재미없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 심심함을 스스로 달랠 방법을 찾게 하는 것 역시 엄마가 가르쳐야 할 중요한 독립의 조각이었다. 지루함을 견디고 혼자만의 놀이를 창조해 냈을 때, 아이는 더 큰 기쁨과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또한 외동으로 자란 아이는 놀이할 때 무조건 자신이 1등이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엄마 아빠가 이기면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떼를 쓰며 울어댔다. 1등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아이에게 자신이 열심히 했다면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타인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인정 욕구와 성취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모든 계획이 완벽해야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공부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기에 악착같이 매달렸지만, 내 곁에는 "실수해도 괜찮아",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아",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실패가 두려워 최고가 될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 지독한 완벽주의는 성인이 되어서도 내 발목을 잡았고,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는 감옥이 되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누구보다 이 말을 많이 해주고 싶었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넘어지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라고.
나의 한계와 과거의 결핍을 인정하고 나니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완벽하게 청소하고 완벽하게 놀아주는 희생적인 엄마 역할을 과감히 내려놓았다. 대신 엄마의 감정과 한계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지금 튼튼해지는 약을 먹고 있어서 몸이 좀 피곤해. 우리 아기 혼자 장난감 가지고 놀아볼까? 30분만 쉬고 나서 같이 놀자."
"엄마가 지금 청소를 해야 하니까, 넌 여기서 혼자 퍼즐 놀이하고 있어."
엄마도 피곤할 수 있고, 엄마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더불어, 결과에 집착하던 나의 옛 모습을 아이가 물려받지 않도록 기꺼이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이건 형아들도 어려워하는 거야. 네가 지금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이번에 엄마가 이겼네? 축하해 줘서 고마워. 너도 최선을 다했잖아. 엄마 마음속엔 네가 1등이야."
완벽하지 않아도, 1등 하지 않아도 사랑해 주는 엄마가 있고 든든한 가족이 있음을 매 순간 확인시켜 주었다.
나를 갉아먹으며 '완벽한 엄마'가 되기보다, 내 욕구를 적당히 챙기며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엄마'가 되기로 한 것이다. 피곤하고 배고플 때 아이가 떼를 쓰듯, 어른인 나 역시 억지로 욕구를 꾹꾹 눌러 담다 보면
결국 화산처럼 터져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육아는 내가 아이를 일방적으로 돌보는 희생이 아니다.
나의 아픔과 한계를 아이와 투명하게 공유하며,
아이에게는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내게는 나를 돌보는 법을 가르치는
'서로를 키워가는 과정'이다.
내가 나를 온전히 돌보고 사랑할 때, 비로소 내 아이에게도 구김살 없는 진짜 사랑이 흘러갈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오늘의 증상
약 기운이나 피로 때문에 무기력할 때, 심심하다고 조르는 아이를 보며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
피곤해서 눕고 싶으면서도 어질러진 집안을 보면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
아이가 놀이에서 지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떼를 쓸 때, 아이의 기분을 무조건 맞춰주려 전전긍긍할 때.
마음 통찰
당신이 청소에 집착하거나 아이의 모든 지루함을 채워주려 하는 것은 모성애가 아니라, 과거 '돌봄 받지 못했던 내면 아이'의 상처가 만들어낸 불안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결핍 없이 키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때로는 지루함을 혼자 견디는 힘을, 때로는 기꺼이 실패하고 승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를 세상 앞에서 더 단단하게 자립시키는 진짜 사랑입니다. 나를 갉아먹으며 '완벽한 엄마'가 되려 하지 마세요. 엄마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편안하게 웃을 수 있어야, 아이의 우주도 비로소 평온해집니다.
마음 처방전
1. 하루 한 번 '흐린 눈' 장착하기
아이를 키우며 완벽하게 깨끗한 집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집안일은 하루에 '내가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쪼개서 하세요.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불안감이 올라올 때는 "아이가 사는 집이니 당연한 거야"라고 소리 내어 말하며 과감히 '흐린 눈'을 장착하세요. 집을 치우는 것보다 당신의 방전된 체력을 먼저 충전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2. 아이에게 '건강한 심심함' 선물하기
아이가 심심하다고 조를 때마다 즉각적인 재미를 대령하는 '엔터테이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엄마의 한계를 명확히 설명해 주세요. "엄마는 지금 약을 먹어서 30분 동안 누워서 쉬어야 해. 그동안 혼자 재밌는 장난감을 찾아볼까?"라고 말하며, 아이 스스로 지루함을 견디고 자신만의 놀이를 창조해 낼 시간을 허락해 주세요.
3. "져도 괜찮아" 기꺼이 실패하는 연습 함께하기
아이가 놀이에서 무조건 이기려고만 한다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함을 가르쳐줄 절호의 기회입니다. 져주기만 하지 말고 가끔은 엄마가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아이가 분해해서 운다면 이렇게 말해주세요. "엄마가 이겼지만, 네가 떼쓰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한 모습이 정말 멋졌어. 져도 괜찮아. 다음번엔 네가 이길 수도 있는 거야." 작은 실패와 패배를 안전한 집에서 미리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훗날 아이를 지켜줄 가장 강력한 마음의 예방주사입니다.
#이중육아 #날라올라 #육아에세이 #우울증약 #약물조절 #완벽한엄마보다행복한엄마 #실패할용기 #지는법배우기 #내면아이치유 #강박내려놓기 #대물림끊기 #엄마의성장 #자립심 #행복한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