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의 늑대를 잠재우는 법 -
"살기 위해 먹고 있어요."
주치의는 식욕이 전혀 없다는 내 말에 자나팜용량을 줄이고 새로운 약을 처방해 주었다. "식욕이 좀 많이 당길 겁니다. 하지만 지금 환자분께는 그게 도움이 될 거예요." 의사의 말처럼 약은 내게 잘 맞았다. 40kg의 앙상한 몸에 비로소 온기가 돌고,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몸이 약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이사 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첫 번째 주치의가 떠올랐다. 그분은 내게 마지막 선물처럼 'EFT(감정 자유 기법)'를 권해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분과의 인연부터가 기적 같았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처음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을 때, 초진 예약은 기약 없이 밀려 있었다. 포기하고 있던 내게 병원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검사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아 빠른 치료가 필요해 보이니 일정을 당겨주겠다는 배려였다. 그 따뜻한 손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마지막 진료 날,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을 남기셨다.
"인생이 무척 고달픈 사람의 경우에는, 인생의 회차가 조금 많이 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짧은 위로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차올랐다. 유독 혹독한 시련이 몰아친 이유가 이번이 삶의 마지막 회차이기 때문이라면, 그래서 남은 숙제들을 한꺼번에 쏟아낸 것이라면 억울할 것도 없었다. 이 매듭들을 다 풀고 나면, 아무런 미련 없이, 평온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런 생각을 하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질문 하나를 건드렸다.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지, 도대체 왜 낳아서 당신들도 힘들고 나도 이렇게 병들게 했을까.'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원치 않게 태어났다며 부모에게 소송을 건 아이의 기사가 남 일 같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럼에도 부모님은 끝까지 책임지려 했던 게 아닐까' 믿고 싶은 양가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3월, 세상은 봄을 준비하지만 서른 후반의 엄마에게 3월은 '적응'이라는 전쟁터다. 이사 온 동네의 새로운 유치원. 아이는 낯선 공간과 선생님, 친구들 사이에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입학식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머니, 00 이가 겁이 좀 많은가 봐요. 연극에 나온 늑대를 보고 무섭다고 많이 울었거든요."
키즈노트 속 사진에서 다른 아이들이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을 때, 우리 아이만 웃지 못하고 있었다.
그네도, 에스컬레이터도 무서워하는 아이. 잠들기 전 들려주는 동화에서조차 늑대가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이. 그 겁 많은 뒷모습을 보며 자꾸만 나의 어린 시절을 투영한다.
'나도 우리 아이처럼 겁이 많았을 텐데. 그 공포를 어떻게 견뎠을까.'
어릴 적 나는 겁이 많고 관찰력이 좋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 기질은 보호받지 못한 환경 속에서 '약함'이라는 상처로 굳어졌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현남이 동은에게 "사모님은 어떤 아이였을까, 웃으면 이렇게 예쁜데..."
그 말을 들으니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동은, "글쎄요.. 난 어떤 아이였을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폭력이 한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가끔 생각했다.
지독히 가난해도 좋으니, 부모가 사랑해 주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어떤 아이가 됐을까. 고달픈 생의 회차 속에서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에니어그램, MBTI 등 수많은 기질검사들을 헤매던 시간들은, 사실 잃어버린 '나'를 알고 싶다는 절규였다.
다음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조용히 나만의 치유 의식인 'EFT(감정자유기법)'를 시작했다. 한겨울, 엄마에 의해 알몸으로 쫓겨나 아빠의 잠바 하나만 걸친 채 떨던 그 초등학생 아이를 불러냈다.
"비록 한겨울에 알몸으로 쫓겨나 공포와 수치심을 느껴야 했지만, 그런 상처를 가진 나 자신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사랑합니다."
톡, 톡, 톡
손날 타점을 두드리며 확언을 뱉었다. 정수리, 눈썹, 눈가를 차례로 두드렸다. 차가운 공기와 고립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다 "이제는 내가 그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라는 문장에 다다랐을 때, 둑이 터진 듯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너무 아파서, 혹은 살기 위해 철저히 외면해 왔던 그 아이가 내 눈앞에서 떨고 있었다.
"미안해. 그동안 널 많이 외면하며 살았어. 정말 미안해."
울음 섞인 사과에, 마음속 아이가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이 아팠어... 고마워. 이제 따뜻해지고 있어. 사랑을 느끼고 있어."
아들의 두려움은 늑대라는 동화 속 캐릭터였지만, 나의 두려움은 지켜줘야 할 존재로부터 버려지는 실존적 공포였다. 아들이 늑대를 무서워할 때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듯,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기로 했다.
치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40kg의 몸에 밥을 넣어주고,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듯
내 안의 어린 나에게도 따뜻한 옷을 입혀주는 것.
그것이 '이중육아'를 하며 배워가는 가장 큰 사랑이다.
기억 속 차가운 거리에 서 있던 아이는 이제 내 품 안에서 잠이 든다. 아빠의 낡은 잠바 대신, 내가 건넨 사랑이라는 담요를 덮고서.
이제 더 이상 춥지 않다. 우리는 함께니까.
오늘의 증상
아이의 작은 두려움이나 기질을 보며 나의 아픈 과거가 투영되어 과하게 불안해질 때.
"나는 왜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까"라는 근원적인 원망이 울컥 올라올 때.
살기 위해 애쓰는 내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지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 때.
마음 통찰
예민함은 결함이 아니라, 위험한 세상에서 당신을 지켜내기 위해 발달한 고성능 안테나입니다. 당신의 인생 회차가 유독 고달픈 이유는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번 생에서 해결해야 할 무거운 숙제를 짊어질 만큼 단단한 영혼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그 안테나를 외부가 아닌, 춥고 떨고 있는 '내 안의 아이'를 향해 돌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 처방전
1. '사랑의 담요' 확언 (Self-Soothing)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불쑥 찾아올 때, 양손을 어깨에 얹고 스스로를 안아주며 말해주세요. "그때 너는 정말 무서웠겠구나.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있어. 너를 지키는 든든한 담요가 되어줄게." 타인이 주지 못한 보호를 이제는 성인이 된 내가 나에게 직접 선사하는 연습입니다.
2. 신체 타점 두드리기 (EFT 응용)
불안이 엄습할 때 손날이나 눈가, 쇄골 등 부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현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읊조려 보세요. "비록 지금 불안하지만, 이런 나를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신체적인 자극은 뇌에 '지금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3. '생의 목적' 재정의하기
내 삶이 왜 이토록 힘들었는지 자책하기보다, "이 상처를 끊어내고 내 아이에게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다"라고 생각의 프레임을 바꿔보세요. 상처는 대물림의 도구가 아니라, 치유의 서사를 쓰는 작가님만의 귀한 잉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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