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방임

- 우리 집에 보호자는 없었다 -

by 날아올라

어두운 밤, 미군 부대 앞 화단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 앞을 지나가는 낯선 이방인들의 무심한 시선보다 나를 더 얼어붙게 한 건,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지독한 부재였다.


아빠를 기다리며 떨던 그 무서운 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꽃이 되어 방치되었다.




엄마가 나에게 했던 폭력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내 기억에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정서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엄마는 남매의 성적 수치심을 놀잇감으로 삼기도 했고, 나는 이미 폭력에 길들여져 저항할 힘도 잃은 채 공포에 떨며 오줌을 지리곤 했다.



서른 후반이 된 지금에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그날도 엄마의 광기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되어 쏟아졌다.

집에는 아빠도 오빠도 없었다. 아니, 그들은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늘 곁에 없었다.


영하의 날씨에 알몸으로 쫓겨나 아빠의 낡은 잠바 하나를 걸친 채 거리를 걸으며 울었다.

추운 것보다, 알몸이라는 수치심보다, 나를 도와줄 어른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더 시리고 서글펐다.


지금은 계절에 맞지 않는 옷과 개인위생이 안되어 있거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아동학대로 신고라도 하겠지만,

그때 내 곁에 '얘야, 괜찮니?'라고 물어봐 준 어른은 없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엄마에 대한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 하나 남아, 희망고문했다.


학교 가던 길에 옷에 실수를 하고 겁에 질려 돌아왔을 때, 평소와 달리 나긋한 목소리로 따뜻한 물에 씻겨주던 엄마.

그 순간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렸지만,

그것은 약 기운이 잠시 엄마를 붙잡아준 찰나의 평화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외할머니댁에 가서 병원을 다녀오고 약을 먹을 때만 아주 잠깐 좋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그 약은 마법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공포였다.


약을 먹은 엄마는 조용해졌지만,

그건 평화가 아니라 '꺼져가는 촛불' 같았다.

나긋한 말투는 반쯤 풀린 눈과 함께 어눌하게 늘어졌고, 온종일 시체처럼 잠만 잤다.


약에 취해 축 늘어진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 같아 보였다.


밥도 먹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만 응시하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엄마를 보며 덜컥 겁이 났다.

저러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어린 마음에 자는 엄마의 코밑에 손을 대어 숨을 쉬는지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약이 떨어지는 순간,

고요함은 순식간에 광기로 변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나긋하던 목소리는 금세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로 바뀌어 할퀴었다.


매일 딜레마에 빠졌다.

나를 때리는 괴물 같은 엄마가 무서워 약을 먹길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시체처럼 잠만 자는 엄마가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약을 먹으면 굶어 죽을까 봐 두렵고, 약을 안 먹으면 맞아 죽을까 봐 두려웠던 매일.



약봉지 하나에
엄마의 인격이, 그리고 나의 생존이 달려있던
그 위태로운 교차로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빠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늘 일에 치여 가난과 싸웠지만, 집에 있는 것은 텅 빈 냉장고와 차가운 말들 뿐이었다.


퇴근 후 엄마의 난동을 묵묵히 치우며 한숨 쉬던 지친 아빠의 뒷모습, 정작 아이인 나를 품어줄 여력은 없었던 아빠 앞에서 고통을 꺼내놓을 자리는 없었다.


밤늦게 아빠가 돌아오길 이불속에서 기도하며, 유일한 기둥인 아빠마저 사라질까 봐 숨을 죽였다.


오빠 역시 가시덤불에 찔리고 있었지만, 그는 나를 찌르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엄마의 화살이 본인에게 올까 봐 나를 공격하고 엄마를 닮아가는 오빠를 보면서 무서웠고,

폭력 속에서 엄마의 광기보다 무서운 '가족의 외면'을 먼저 배웠다.


미친 엄마와 무력한 아빠, 난폭한 오빠사이에서 그저 투명인간이 되어야 살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시덤불은 사방에서 찔러왔다.

외가 친척들도 엄마의 상태를 알았지만, 1년에 한두 번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가끔 찾아와 미안하다 말하던 삼촌의 눈빛에는 연민과 번거로움이 서려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깨달았다.


내가 지워져야만 이 가족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을. 정작 나를 안아줄 온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방치된 유년의 조각들은 그곳에서 나를 가장 약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지키는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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