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그리고 가짜 친구

- 나만 진심이었던 세계의 붕괴 -

by 날아올라


가난과 엄마의 광기라는 벽에 가로막혀, 내 주장이나 생각을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학교에서 준비물이 필요할 때면 아빠에게 그 말을 꺼내기 위해 몇 시간씩 입술만 달싹였다.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건 미안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복잡한 일이었다.


말수가 적어질수록 주변의 눈치만 늘어갔다.

누군가 귓속말을 하면 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싶어 온 신경이 곤두섰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작니? 좀 크게 말해봐라"는 어른들의 다그침과, "너는 왜 땅만 보고 걸어?"라고 묻는 아이들의 시선 앞에 단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우며 극도로 내성적인 아이로 굳어갔다.


개인위생이 좋지 않았던 탓에 유치원 때부터 기피 대상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왕따가 되었다.


선생님이 데리러 오셔도 친구들의 따돌림이 무서워 다락방에 숨어, 숨 죽이던 날들.

돌이켜보면 우울증은 그 어두운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스스로 몸을 씻고 위생을 챙기기 시작하자 비로소 친구들이 생겼다.


그중 다경이는 삶의 작은 숨통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다경이네 어머니는 저녁 늦게까지 머물다 가는 나를 아무런 기색 없이 따뜻하게 먹여 보내주셨다. 그 집의 밥상은 차가운 냉장고와는 다른, 처음 느껴본 '가정의 온기'였다.


반면, 뒤늦게 친해진 수정이와의 우정은 해방감이라는 다른 색깔을 띠고 있었다.


어느 날 수정이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을 때,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치하는 집이 주는 서글픈 자유.

그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지독히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지 말자는 수정이의 말에 기꺼이 동의했다. 만화책을 보며 수다 떨던 그 시간은 금지된 열매처럼 달콤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침 일찍 문을 두드린 건 가족이 아닌 담임 선생님과 다경이었다.

그들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마 선생님이 찾으러 오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건, 그때 선생님과 다경이가 보여준 그 한 줌의 관심 덕분이었으리라.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유일한 빛이었던 다경이와 다른 반이 되면서 다시 거대한 외로움 속에 던져졌다.


설상가상으로 기존에 친했던 친구들마저 외면하기 시작했다. 우리 오빠가 같은 반 여자아이의 오빠를 때리고 괴롭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아이는 내 친구들에게 나를 따돌리라고 선동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 아님에도 '가족'이라는 굴레는 학교에서조차 죄인으로 만들었다.


소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아는 여자 아이는 집으로 끊임없이 장난전화를 걸어 괴롭혔고, 반 전체에 엄마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이의 아버지는 사랑을 전한다는 교회의 목사님이었다.

참다못한 아빠는 욕설이 담긴 장난전화 내용을 녹음해 교회로 향했다. 목사 부부는 "우리 딸 목소리가 아니다."라며 끝까지 부인했지만, 그날 이후 괴롭힘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하지만 이미 난도질당한 마음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엄마라는 존재는 지독한 부끄러움이 되었다.


수업 시간, 바로 내 앞에서 "쟤네 엄마 미쳤대"라고 속삭이던 아이들의 말소리를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운동회 날 엄마가 학교에 올까 봐 친구들 뒤로 몸을 숨기며 강박적으로 불안해했다.

'저 사람이 우리 엄마라는 걸 아무도 몰라야 해.' 그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기댈 곳 없는 마음은 자꾸만 독이 든 인연에게 손을 뻗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재희는 중학교 때 다시 나타나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평판이 좋지 않은 아이였지만, 그 지독한 외로움이 꼭 내 것 같아 차마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비극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되었다.

당시 유리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170cm가 넘는 키에 숏컷이 잘 어울리던 유리는 누구보다 명랑하고 상냥했다. 그늘진 구석 하나 없이 밝은 유리는 세상에서 가장 닮고 싶은 빛이자, 내 학창 시절 가장 큰 의지가 된 존재였다.


그런데 유리는 유독 재희를 대놓고 혐오했다.

어느 날, 재희는 내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유리가 자기를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그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었을지언정, 그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왕따를 당하며 이유 없는 미움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 누군가에게 거부당한다는 고통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 아픔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 삶의 빛이었던 유리에게 재희를 위해 친절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과 분노였다.


결국 재희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내 세계의 가장 큰 축이었던 유리와 절교하는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마주한 진실은 잔인했다.

이과를 선택한 나와 달리 문과에서 같은 반이 된 유리와 재희는, 언제 싸웠냐는 듯 서로 마주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그토록 날을 세웠던 두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이처럼 지내는 모습은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단둘이 마주친 유리는,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 짧은 인사 한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나만 그 관계 속에서 진심이었고, 나만 홀로 그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집 안에는 광기 어린 엄마가, 집 밖에는 속을 알 수 없는 가짜 친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비정상적인 관계들 틈에서 다시 한번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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