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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선임 Aug 21. 2021

술맛을 잃어버린 술쟁이(였던 엄마)

술이 술술 들어가는 그 여유로움이 그리운 요즘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마시는 술을 좋아한다.


그것은 술맛이 좋아서라기보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더 좋아서이다.


튼튼이가 뱃속에 찾아온걸 알았던 날, 내가 가장 걱정했었던 것은 바로 봄바람이 분다며 신나게 술술거리며 다녔던 것이었다. 새 생명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건가 하는 생각과 자괴감으로 힘들었었다. 하지만 튼튼이는 감사하게도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그 날 이후 (임신을 했으니 당연히) 금주를 하게되었고, 그때로부터 1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알콜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출산 후에도 모유수유를 했었으니 자발적 금주의 기간은 약 2개월 정도네.


사실 억지로 참으면서 안 마시는게 아니라 그냥 안 마시게 되었다.


자고로 술이라는 것은 마음이 급할 때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의식하지않고 인생을 이야기할 때나 머릿 속에 든 복잡한 생각을 혼자 정리할 때나 생각이 난다. 요즘 난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을 정도이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입에 대지 않게 됐다.


"술 못 먹어서 너무 힘들겠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아기를 낳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근데 참 신기한게, 나도 내가 힘들 줄 알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힘든적은 없었다. 그냥 애기 키우고 출근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 일과를 보면 술 맛이 생각날 겨를이 없다.


아침에 아기가 일어나면 출근 준비를 하면서 수유하고 중간중간 놀아주면서 내 아침밥도 (아주 가끔) 챙겨먹는다. 아홉시에 베이비시터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출근룩으로 갈아입고 아홉시 '땡'하면 집을 나선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6시, 시터 선생님이 퇴근하시면 남편이 오는 8~9시까지 또 독박육아. 그리고 남편이 오면 늦은 저녁식사 후 아기 밤잠을 재우면 그때부터 다시 밀린 잔업/샤워/독서/글쓰기 등을 한두시간 하다 잔다.


그나마 음주가 가능한 시간대가 아기 밤잠을 재우고난 후인데, 그 때 술을 먹고 헤롱헤롱 거리고 있다간 아기가 깼을때 아기를 안기도 위험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아기가 깰때 일어나야하는데 너무나 피곤하다. 그래서 술을 마셔야겠단 꿈은 꿔보지도 않았다.


언젠간 다시 술잔을 기울이겠지만, 지금 내 술잔은 주방에서 사라진지 좀 되었다.


사실 술잔들을 어디에 뒀는지도 모르겠다. 주방에는 아기가 마시고 난 세척해야할 젖병과 이유식을 만드는 조리도구들, 아기분유물, 분유캔, 열탕소독하고 건조하는 아기용품들만이 가득하다.


광복절 연휴에 춘복이엄마가 2시간컷으로 바람을 쐬어주겠다고하여 덕분에 순간이동하듯이 반포 한강공원을 다녀왔었다. 보통의 삶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보였다. 둘둘이 짝지어서, 또는 친한 친구들과 돗자리펴고 앉아서, 손에 다들 들고 있는 캔맥주나 술잔을 보니 나도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춘복이엄마는 모유수유 중이고, 나는 술 맛을 잃어버렸기에 우리는 과일주스를 한잔씩 마셨다. 쪼릅쪼릅 주스라도 마시다보면 나도 저들처럼 술 생각이 나려나 했더니 웬걸, 밤잠 재우고 온 튼튼이가 잘 자는지 집에가면 방문 열고 봐야겠단 생각뿐이었다.


확연하게 달라진 나의 삶의 모습을 떠올리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신기하면서도 약간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


그렇다고 그 즐거움을 잊은 것은 아니다.


가끔은 밀린 일을 사무실에서 하다가, 나처럼 야근하던 팀원과 벙개로 반주하고싶다. 출장가서 고객사와 술잔기울이며 진솔한 업무 이야기도 하고싶다. 금요일 저녁에는 불금을 외치며 저녁대신 순대곱창볶음에 소주한잔 캬 하고 싶다. 주말에는 맛있는 와인바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목이 아플 때까지 수다떨고 싶다. 부모님 생신에는 아빠가 좋아해서 아껴둔 술을 꺼내서 같이 짠 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오돌뼈에 파란 소주 한잔이 생각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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