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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밥그릇, 기획팀과 닭칼국수

10/5 토요일 테이블

by 은재

윌리 훌륭한 커피야. 커피만으로도 아침 식사가 된다니까.

린다 달걀 프라이 좀 만들어줘요?

윌리 아니. 좀 쉬어요.

린다 당신 아주 편안해 보여요.

_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강유나 옮김, 민음사)



샘플이 든 큰 가방 두 개, 점잖은 옷차림, 매주 네 시간 이상의 외근. 아서 밀러는 1930년대 회사원 윌리의 몰락을 그린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194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윌리는 전형적인 회사원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나는 회사라고 하면 상사의 고성, 동료와의 은밀한 경쟁, 의욕 감퇴와 무거운 발걸음을 떠올리곤 했다. 나는 스물네 살이었고 (통계적으로) 아직 살 날이 많아서, 30년 이상을 그곳에서 보낸다고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을 찾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법인데.


2016년부터 공공기관, 컨설팅회사, 전혀 다른 분위기의 조직에서 인턴십을 했고 지금은 본가 부산에서 제조사 기획팀을 다니고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 재미있다. 내가 찾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오늘은 나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재미있게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세명의 친구를 초대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지만, 각기 다른 팀과 성별, 그리고 다른 국적을 가진 동료들이다.


토요일 오후, 비가 슬슬 쏟아지길래 닭칼국수를 팔팔!

아니나 다를까 예고되었던 태풍 미탁이 불어닥치길래 원래 시키려던 배달 음식 생각은 쏙 들어가고 언젠가 꼭 해 먹겠다 벼르며 저장해둔 닭칼국수 레시피를 꺼냈다. 닭칼국수는 닭고기와 칼국수 면, 기본 야채만 있으면 멋 부릴 수 있는 메뉴이기도 하고, 서늘한 날씨에 눅진한 게 딱 이기도 하고.


재료: 분절 닭, 양파, 감자, 식용유, 물, 소금, 액젓, 대파, 칼국수 면, 간 마늘, 후춧가루

1. 양파 1개, 감자 1~2개를 채 썰어 준비

2. 식용유 3 숟갈에 분절 닭을 넣고 볶다가 양파도 넣어 볶기

3. 닭 껍질이 노릇해지면 물 9컵, 소금 1/2 숟갈, 액젓 1/3컵 넣고 끓이기

4. 물이 끓으면 감자를 넣고 푹 끓인 뒤 감자가 익으면 물, 간 마늘 넣기

5. 물에 헹궈 전분기를 없앤 면을 끓는 국물에 넣고, 면이 익으면 대파, 후춧가루를 올려 완성


엔지니어 선배 K는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품질팀 막내지만, 학창 시절부터 부동산에 머리가 깨어 중개 아르바이트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한 건 수익을 올릴 때마다 과외비 맞먹는 용돈을 벌었고, 작심하고 공부한 끝에 공인중개사 1차도 통과했다. 아쉽게 2차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그의 말에 나도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들었는데, 그는 되려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그냥 회사원 하면 재미없잖아!


재미란 무엇일까? 아직 미생일 적 나는 늘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요리를 좋아하니까, 식품 회사에 취직해 신박하고 맛난 반조리식품을 기획하는(꽤 구체적인데?) 마케터가 돼야지. 혹은 전 세계로 출장 다니며 최상급 치즈를 엄선해 공수하는(너무 구체적인데?) 바이어가 되거나.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필요 이상으로 직업을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재미’의 가장 유력한 어원으로 한자어 자미(滋味)가 있는데, 이때 자는 불을 자滋, 맛 미味를 쓴다. 맛 볼 수록 늘어가는 것, 혹은 맛을 음미하는 행위 자체를 재미라고 부른 셈. 즉 재미는 있다, 없다로 나누기보다 계속할수록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면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팀 안에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있고, 업무를 계속하며 회사를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나를 찾는 동료들이 하나 둘 생겨 문제를 해결하는데 내 힘을 보태는 그 순간의 맛.


또 재미는 이런 것이다. 비서 실장님이 연차를 쓰고 자리에 없는 날, 사장님을 위한 간식이 가득 있는 좁고 따뜻한 전용 탕비실에 기어 들어가 쿠크다스니 마가레트니 자잘한 과자를 맘껏 집어 먹는 일. 그게 한참 풀리지 않는 엑셀 수식 오류로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데다, 창밖의 햇살이 야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라면 더더욱. 난 그토록 맛난 음식과 재밌는 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토요일 일곱 시, 디저트는 초코 롤케이크와 맥주

지난주 독일에서 파견되어 온 Nico는 이제 막 한국의 매운맛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마늘향이 온 동네에 가득하다면서도 환하게 웃는, 수염이 텁수룩한 인턴. 유럽의회에 따르면 85%의 학생이 직장을 얻기 위해 해외 근무 혹은 인턴십을 경험한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나도 언젠가 중국,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지사 근무에 지원하려고 한다. 외국에서 돈을 벌면서 현지 문화도 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직장 생활의 재미일 테니.


아, 회사 생활이 재밌다고 마무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마르게 구는 선배, 뭘 파는지도 모르는 동료, 무조건 마감 기한을 맞추라는 본사 때문에 멀미가 난다. 그러나 급여가 주는 엄청난 안락감, 아침마다 내 자리를 차지하고 맡은 문제를 해결했다는 자부심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누릴만한 것이다. 최선을 다해 한 그릇 두 그릇 해내는 것. 그리고 퇴근 후 친구 혹은 가족과 또 다른 밥그릇을 나누며 영혼을 채운다는 사실만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다.


At the table

Nico (25세, 인턴 엔지니어)

K (30세, 품질 엔지니어)

G (28세, 설계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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