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 토요일 테이블
당신은 특이하게 행복과 가까운 곳에 있어. 재료는 다 준비됐지. 그것들을 결합하는 움직임 하나가 부족할 뿐이야. 운명의 여신은 그 재료들을 좀 떨어뜨려 놨어.
_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류경희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취업을 쉽게 했다. 아 물론 나도 카페에서 공부하던 중 불합격 통보를 받고 마시던 커피잔 속에 눈물을 방울방울 흘린 적은 있다. 또 내가 모집한 면접 스터디에서 나만 빼고 모두 최종 합격해 무안하고 속상했던 적도 있다. 또 서울대입구역 근처 사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서울대 도서관에서 팔자에도 없는 공무원 수험서를 뒤적거려 본 적도 있다. 또, 또… 아무튼 구직의 모멸감은 많이 느꼈으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욕심내지 않고 깨끗이 승부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학부 시절 초반에 문학을 전공할 적, 가장 가까운 동기였던 '인'이는 뛰어난 타로마스터이자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다. 지금은 오랜 수험 생활을 끝내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나였다면 그 어렵다는 고시 공부를 몇 년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금쯤 머리를 풀어헤치고 신발 한 짝 잃은 채로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것 같다. 그러나 인이는 그보다 더 진취적이고 독창적인 위안처를 찾았고 그것은 78장의 매혹적인 그림 속 세상, 타로 Tarot 카드였다.
공부를 마치고 한 장, 한 장 그날의 카드를 뽑으며 스스로 기분을 헤아리고 미래를 점치며 타로 일기를 써 내려간 그가 대견하고 멋졌다. 난 다시 목표를 향해 타오를 수 있을까? 또래 친구들에게 토로해도 멀쩡한 직장 잘 다니며 배부른 소리 한다는 타박만 돌아왔다. 내밀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친구와 공간이 필요했다. 나도 모르겠는 내 속마음을 들어주고 읽어줄 사람, 인이에게 연락할 시간이었다.
토요일 네시 반, 생 닭 및 야채 손질, 미리 만들어 두는 소스
팟타이는 시간이 지나면 퉁퉁 불기 쉬워서, 닭구이를 먼저 만든 후 팟타이를 볶는 순으로 상을 차릴 예정이다. 팟타이란 태국의 볶음 쌀국수 요리로, 집에 흔히 있는 굴소스와 마성의 고린내를 풍기는 피시소스의 황금비율로 웬만한 손님 입맛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여기에 땅콩이든 아몬드든 집에 있는 흔한 견과류를 잘게 부숴서 고명으로 올려주면 달콤하고 고소한 맛 또한 별미.
치킨구이
1. 잡내 제거를 위해 생 닭에 맛술 2 숟갈을 뿌리고 우유에 자작하게 20분 이상 담가 두고 오븐 예열하기
2. 간장, 설탕, 올리고당, 다진 마늘을 3 : 2 : 1 : 2 비율로 간장소스 만들기
3. 고기의 우유를 제거하고 후추와 맛술로 간한 뒤 내열 용기에 넣어 2번 소스를 끼얹은 후 오븐 직행
팟타이
1. 쌀국수 면을 물에 30분 이상 불려둔 뒤 양파, 마늘, 파프리카 등 야채 다지기
2. 설탕, 피시소스(액젓), 굴소스, 레몬즙을 1 : 1 : 2 : 2 비율로 소스 만들기
3. 손질해둔 야채를 투명해질 때까지 볶은 뒤, 돼지고기 고추를 넣고 충분히 노릇해질 때까지 볶기
4. 불려둔 쌀국수 면을 넣고 소스를 끼얹은 후 약불에 충분히 덥히기
5. 접시에 담은 후 땅콩가루를 골고루 뿌려 마무리.
토요일 여섯 시 반,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식사 시작
낯가림 없고 나돌아 다니기 좋아하는 내가, 신중하고 꼼꼼하며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그와 어떻게 가장 가까운 동기가 될 수 있었을까? 전혀 다른 성격의 친구와 이십 대 초반을 함께한 덕분에 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 즐거운 것이 누군가에게 불편하고, 반대로 친구의 취미를 통해 내가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커뮤니티를 알게 되었다.
토요일 일곱 시 반, 카드 덱 Deck을 펼치면
흔히 타로라고 하면 검은 천을 두르고 수정구슬을 쓰다듬는 집시 점쟁이를 상상하지만, 타로는 그보다 훨씬 심층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기호와 상징으로 내면을 분석한다. 중요한 Major 카드 22장과 작은 Minor 카드 56장은 역동적이고 때로는 우울한, 삶의 여러 면모를 표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는 78장 카드 중 Page of Swords라는 카드를 세 번이나 뽑고 말았는데, 생긴 것도 꼭 나하고 비슷하다. 곱슬곱슬한 산발머리에 짐짓 당당하지만 위태위태하게 검을 거꾸로 쳐들고 있다. 꼭 누군가 '야 그거 그렇게 드는 거 아니다’ 할 것 같은 모양새. 그러면 이 친구는 난 내 맘대로 할 건데, 하겠지. 뒤에는 자유로운 구름이 흘러가고 언덕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 처리까지 끝내준다. 사실 이 카드의 이름을 직역하면 '검을 든 어린 종'으로, 불안정하지만 고집스러운 면모를 말한다고.
그 후로도 역동적이고 우울하거나 때로는 기괴한 삶의 스펙트럼이 하얀 덱 deck 위에서 펼쳐졌다. 카드 한 장 한 장뿐 아니라 의외의 조합을 풀이하려고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내가 잊었거나 무시하고 넘어갔던 기억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엮여 나와, '읽씹' 했던 마음의 메시지를 되돌아본다. 개인적인 카드점 결과는 말할게 못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촛불 앞에서 카드 속 내러티브를 따라 숨겨둔 이야기를 술술 실토하고 있던 나였다. 즉,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뽑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다음번 연애운 카드에는 교수형에 처한 남자 따위는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토요일 아홉 시, 당이 떨어졌으니 디저트를 먹자고
이렇게 매니악하고 매혹적인 카드점이라니.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공부하면서 불안했을 하루하루를 취미로 당당하게 극복한 '인'이. 이렇게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스트레스와 불안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신만의 극복 방법을 찾은 친구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얻었다.
우리는 모두 3장의 타로카드를 뽑을 수 있다. 각각이 주는 의미는 길할 수도, 흉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3장 카드 안에서 내 마음의 메시지를 투영해 조합하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이 글이 책이 될 때쯤 친구에게 좋은 소식이 있기를. 그것이 어떤 카드이든 원하는 답은 우리 안에 이미 있으니.
at the table
- 인(26세, 예비공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