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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좀 한다는 소문, 밀푀유 나베로부터

6/12 수요일 테이블

by 은재

“애플파이로 하지 뭐. 아냐 잠깐, 저기 저 크고 두툼한 건 뭐지?”

메이는 파이를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았다.

“파인애플 크림.” 그녀가 말했다.

“그럼 그걸로 한 조각 잘라 줘.”

_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김승욱, 민음사)



직장생활이란. 삶이 누구에게나 선택인 것은 아니다. 같은 엑셀과 같은 보고 장표. 의미가 없거나 있는 숫자들. 얼굴도 모르는 전화 건너편 동료. 그럼에도 내 일을 썩 좋아하고 있다. 물론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에서 보람을 찾기 때문은 아니다. 내 조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눈을 떠서 멋진 옷을 골라야 할 이유가 있고, 내가 모르는 결혼과 육아와 심지어 바다 저편 아부다비 공사현장에서의 삶에 대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후에는 매달 한번 적지 않은 금액이 통장으로 들어온다. 돈으로 친구들에게 술을 사고, 나에게 마사지숍 회원권을 사주고, 그러고도 남은 돈을 저축해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꿈을 산다. 나에게 직장 동료는 친구와는 다른, 퇴사와 만족의 은밀하고 아이러니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손님이다.

이번 테이블은 평일 수요일에 준비했다. 매월 한번, 전 직원이 정시에 퇴근해야만 하는 Family Day 였기 때문이다. 이날만큼은 늦게까지 업무에 몰두하는 개발팀, 인사팀 동료들도 부를 수 있다. 이들에게 어떤 요리를 해줘야 요리 좀 한다는 좋은 소문이 날까? 선선한 여름 날씨, 맛도 모양도 가성비도 좋은 밀푀유 Mille-feuille 나베야 말로 적격이다.


화요일 퇴근 후, 전골 야채와 고기 구입


밀푀유 나베와 같이 곁들일 메뉴로 참치카나페를 떠올렸다. 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동료들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외 남은 식빵을 구워 도톰하고 달콤한 크루통을 만들기로 했다. 전날 배추, 청경채, 소고기, 참크래커, 혹시 모자랄 때를 대비한 칼국수 면만 사면 된다. 편한 친구가 올 때와 달리 동료들이 올 때는 흠 잡힐 만한(?) 개인적인 물건은 물론이고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소고기는 전날 미리 냉장실에 넣어 해동시킨다.



수요일, 퇴근 후 여섯 시 조리 시작

밀푀유 나베 재료: 얇게 썬 소고기, 배추, 청경채, 가쓰오부시 장국 혹은 육수

1. 배추를 갈라 최대한 원형 그대로의 둥근 모양을 유지하며 ¼ 등분 하기

2. 청경채, 배추를 깨끗이 씻고 버섯을 길게 갈라 썰기

3. 배추 → 청경채→ 소고기 → 배추 순으로 3번 쌓아 전골냄비에 겹쳐 넣고 장국 혹은 육수를 부어 끓이기

무척 단순하고 나름 미적인 감각도 발휘해야 해서 모두 즐겁게 노동에 동참할 수 있다. 함께 온 네 명의 동료 중 한 명에게 참치 카나페를 부탁하고, 나는 크루통에 들어갈 마늘소스(간 마늘+설탕+올리브 오일)를 만들어 잘게 쪼갠 식빵 조각을 굽는다. 집 안 가득 고소한 마늘 냄새가 퍼지면 함께 한 무리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 칠 것이다.



일곱 시, 보드카와 오렌지주스

이 날 집에 온 동료 한 명과 함께 지난겨울 블라디보스토크 Vladivostok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사온 보드카가 아직 남아 있어서, 새콤한 오렌지주스와 보드카로 손님을 대접했다. 술을 못 마시는 친구에게도 와인잔은 물론 내주어야 한다. 와인잔의 깊고 둥근 볼은 음료의 향을 배가 시키니까.


공교롭게도 이번 테이블에는 개발, 인사, 서비스, 기획팀에 근무하는 다섯 명이 모였다. 일 얘기, 직장 상사 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근사한 저녁 식탁 앞에 앉으니 싫은 소리는 쏙 들어가고 뜨끈한 나베 국물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며 JMT! JMT를 외칠뿐이었다. 졸업 이후로 이토록 허물없이 포커, 훌라, 부루마블을 하는 게 얼마 만이던지. 보드카에 얼큰하게 취해 몇 번이나 벌칙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수요일 열 시, 과일과 맥주


‘은채 씨, 이제 모른다는 말은 하면 안 돼. 직장에서는 끝까지 아는 척하는 거야’.

수습기간을 마치고 정규직으로 전환된 날 사수가 내게 한 조언이다. 몰라서는 안되고, 몰라도 끝까지 안다고 해야 하는 프로페셔널의 세계. 평소 말이 많지 않은 사수가 그날따라 내게 다정하게 건넨 그 말은 그 이후로도 나를 항상 긴장하게 했다. 아는 척 일단 연기했고,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신속하게 혼자 답을 찾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공교롭게도 그 해 입사한 신입은 많지 않았고, 이렇다 할 동기 없이, 물어볼 동료 하나 없이 회사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고 하면 항상 그가 어떤 사람일까 기대하고, 다가갈 기회를 노려 동료를 사귀었다. 너무 개인적이고 깊은 속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진실되게 행동하는 밸런스를 잡기가 어려웠다.


오렌지색 불빛에 화사하게 빛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새삼 이 귀한 친구들이 반갑다. 오기 전부터 우리 집에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고, 눈치껏 과일을 사 오고, 군말 없이 조리를 도와주고 뒷정리에 나서는 이 어른스럽고도 허물없는 친구들이 앞으로도 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를 계속 다닌다거나 승승장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라, 너무 큰 시련은 맞기 않기를, 늘 원하던 것을 좇기를. 혹은 서로의 결혼 식에 초대되기를 하는 바람 말이다.


At the table

K(28세, 엔지니어)

Y(28세, Health and safety)

H(28세, 엔지니어)

M(25세, Energy audi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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