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토요일 테이블
나는 케이크의 노란색과 분홍색 설탕 장미 장식을 파내어 접시 한쪽에 밀어 두고 먼저 당의를 벗겨내 맛을 보았다. 티스푼으로 케이크를 쑤셔서 코코아를 입힌 바삭바삭한 층을 따로 떼어냈다. 구스타프는 구경만 했다.
_엘리자베스 히키, 『클림트』(송은주, 예담)
비가 추적추적 오는 오후였고, 무탈하게 흘러간 한 주였다. 이상하게 일이 편할수록 마음은 불편했다. 하루 아홉 시간씩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던 중 퇴근 후 다니던 어학원에 타투이스트가 수업을 듣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연히 그의 인스타그램을 먼저 알게 되었고, 피드를 채운 블랙엔 그레이 타투는 기합이 넘쳤다. 실제로 만나게 되면 찍소리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하얀 꽃무늬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동글동글한 눈매의 Y 씨가 스스로 타투이스트라고 소개했을 땐 눈이 튀어나갈 뻔했으니까.
나는 모르는 세계,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사람들, 생업과 카르마 사이에서 멋지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두 사람을 초대했다.
토요일 네시, 크림 짬뽕을 만들 재료 손질과 수프 준비
특별한 업을 가진 이들을 초대했으니 특별한 메뉴를 정해야 할 것 같아, 요즘 유행한다는 크림 짬뽕을 골랐다.
준비물: 베이컨(혹은 혼합 해물), 우유, 생크림, 양파, 간 마늘, 대파, 홍고추, 청경채, 치즈
1. (국물) 프라이팬에 중불로 식용유를 달구고, 채 썬 양파와 대파를 충분히 볶은 뒤 간 마늘, 홍고추 넣기
2. 손질한 베이컨 혹은 해물을 넣어 볶은 뒤 우유, 생크림 혹은 크림소스를 부어 약불에 끓이기
3. (스파게티) 냄비에 물이 끓으면 스파게티면을 7분간 익히기. 90% 정도 익으면 찬물에 씻어두기
4. 짬뽕 국물에 청경채, 체다치즈와 삶은 면을 넣고 잘 뒤섞은 뒤 바게트나 치아 버터와 함께 담아내기.
토요일 다섯 시, 일찍 도착한 친구와 육포 주먹밥 만들기
두 번째 메뉴는 쫄깃 짭조름한 육포와 밥을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주먹밥. 만들기 쉬워 일찍 온 친구에게 빚어달라 부탁해도 된다.
준비물: 육포, 고슬고슬한 쌀밥, 김자반, 후리카케
1. 넉넉하게 준비된 쌀밥에 김자반, 후리카케(혹은 밥이랑), 잘게 찢어둔 육포를 골고루 섞기.
2. 비닐장갑에 참기름을 바르고 육포 섞은 밥을 동그랗고 단단하게 말기.
이 외에 참치 토마토 카나페를 만들었고, 짐 빔과 콜라를 준비해 직접 원하는 섞어마시게 했다.
토요일 여섯 시, 식사 시작
대학을 졸업한 Y 씨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했고, 어렵다는 기사 자격증도 땄다. 일찍 취업해 건축사무소에서 3년을 내리 일했다. 시간이 지나도 일이 도무지 좋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자격증이 아깝다고 했지만, Y 씨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떠났다. 말 한마디 할 줄 몰랐지만 무작정 도착한 곳은 호주였다. 언어, 문화, 물리적으로도 한국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워킹홀리데이로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냈지만, 그의 눈에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바로 현지인들의 타투. 남녀노소 타투가 보편적인 나라였지만 그의 눈에는 한결같이 수준 낮은 타투만 보였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그에게 섬광같이 떠오른 한 가지 생각.
-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는데?
디자인을 전공하고, 입체적인 공간에 도안을 실현하던 그가 타투이스트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존경의 뜻으로 짐 빔에 펩시를 반반 섞어 건넨다. 삶의 행로를 정하는 일은 의외로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다. 유학생 시절 친구의 방에 초대받았을 때, 작은 이케아 탁자 위에서 일렁이던 촛불과 보잘것없고 따뜻했던 안주. Y 씨에게는 그것이 지나가던 사람의 팔뚝에 자리한 허접한 문신이었나 보다.
토요일 일곱 시 반, 짬뽕 데우기
또 다른 손님, J 씨가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조금 늦게 합류했다. 찬물에 씻어놨던 면을 짬뽕 국물에 담가 따뜻하게 데웠다. J는 글쓰기 모임의 에디터이자, 작가이자 보드게임 개발자다. 내가 사는 이 지역에 이렇게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우리는 늘 1인 1 업을 생각하지 않던가?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의 저자 앤디 앤드루스만 해도 코미디언이자,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여러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혹은 그 어떤 직업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J는 필즈상을 꿈꾸며 수학과에 들어갔으나 현재는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고, 틈틈이 보드게임 ‘파이트 클럽’을 개발해 올해 초 출시했다. 그가 만든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논쟁과 대화로 경기를 풀어야 한다. 필즈는 수상하지 못했으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그는 진지하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어떤 대화에도 맞장구 쳐줄 수 있는 지식을 겸비한 에세이스트 기도하다.
아홉 시, 짐 콕과 와인을 들이켜면
그럼 나는 뭘까? 업데이트하던 이력서를 생각한다. 내 이력서에는 빈자리가 없다. 유망하다는 학부를 졸업했고, 성적도 좋았다. 자격증도 여러 개 취득했고 토익 성적도 높았다. 세상이 바라보는 120x160픽셀 증명사진 속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는 그렇다. 직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엑셀과 ERP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 고 생각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그게 아닌 것도 아니다.
『인생학교: 일』에서 저자 크르즈나릭은 누구나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주관식 답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과 함께 한 자리였지만, 내 앞에는 객관식 답안만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업(業)이라는 문제가 복수정답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회사를 다니면서 요리를, 다이닝을 계속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부산에 오늘 친구처럼 다채로운 예술가들이 활동했으면 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선택이 아닐지라도, 여러 답안을 정답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되기를. 스파게티면을 넣은 크림 짬뽕처럼 썩 새롭고 감칠맛 날 것이다.
At the table
- at the table
Y (27세, 타투이스트)
J (32세 추정,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