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토요일 테이블
인생 한번
한심하게
살아보지
않을래?
_천계영, 『DVD 디비디』 (서울문화사)
취업 후 자기 계발을 위해 2년 가까이 다니고 있는 학원에서 미국인 앤써니를 만났다. 수줍음 많아 보이는 표정과 다르게 그는 앤서니가 아니라 ‘앤써니’라고 적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지만 사실 그 이름을 특별히 쓸 만큼 가깝지 않았다. 우연히 놀러 간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무리를 벗어나 멀뚱히 서 있는 그와 마주쳐 요리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구워온 초콜릿 쿠키를 먹으면서 EDM과 힙합이 흐르는 가운데 오랫동안 빵과 과자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후 앤써니는 단연 우리 집 최다 방문객이 되었다.
그랬던 그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새 집을 얻게 되어, 이번 주 집들이 파티에 가게 되었다. 초대받을 때는 절대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는 신념(!)에 따라, 망고 칵테일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예전에 시니강 Sinigang 수프를 만들어준 림이가 알려준 레시피로, 필리핀 가정집에서 많이 만들어먹는 디저트라고 한다.
금요일 저녁 열 시, 퇴근 후엔 역시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어야
<망고 케이크 Mango Float >
재료: 다이제(통밀 과자) 50g, 망고(냉동) 1개 혹은 400g, 휘핑크림 100ml, 크림치즈 50g, 초콜릿 바 1개
원래 Graham이라는 통밀 크래커로 만드는 레시피로, 딸기나 후르츠 칵테일(물기 제거)을 사용해도 좋다.
1. 망고는 가로 세로 1cm 내외로 조각내고, 초콜릿 바는 칼로 밀어 슬라이스 만들기.
2. 넉넉한 볼에 휘핑크림과 크림치즈를 넣고 핸드믹서로 단단한 뿔이 생길 때까지 섞기.
3. 원하는 그릇을 고르고 단면의 크기에 맞게 다이제를 잘라 한층 쌓기.
4. 휘핑크림의 절반 분량을 평평하게 바르고, 망고를 평평하게 깔고 이 과정을 반복하여 층만 들기.
5. 만들어 둔 초콜릿 슬라이스를 뿌려 완성
토요일 일곱 시, 앤써니 러브하우스 도착
강서구에서 한 시간 반에 걸쳐 도착한 친구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수영에 자리한 널찍한 오피스텔이었다. 오랫동안 낡고 작은 집에서 생활하던 그가 거금을 들여 옮긴 집답게 작지만 광안대교가 보이는 경치와 깔끔한 부엌이 나도 마음에 들었다. 학원 친구들과 그의 학교 동료까지 열한 명 가까이 모여있었다. 미국인이 초대한 파티라 그런지 서서 한창 small talk, 삼삼오오 모여 별것 아닌 얘기 중이었고. 이 날은 이야기보다는 웃고 떠들다 (만취해서) 춤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들만 요약한다.
1. 스탠드업 스몰토크
이상하게 다들 서 있길래 나도 말똥말똥 서있었다. 다리가 아플 법도 한데, 서로 얼굴만 알던 학원 사람들과 말을 트면서 한참 떠들다 보니 서있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금방 갔다. 이때 앤써니가 직접 섞어 먹으라고 통 크게 잭다니엘, 버번 등 위스키와 깔루아(리큐어)를 내놓았다. 그의 미국인 동료 D가 만들어준 칵테일은 무지개다리를 건널 것처럼 맛있었다.
칵테일을 직접 만들어 마신 것은 처음인데(M.T. 에서 섞어마셨던 그 비슷한 것은 제외하고) 이게 굉장한 아이스브레이커였다. 이것저것 섞고 서로 바꿔 마셔보면서 직접 만드는 재미도 있고, 자기만의 황금 제조법을 은밀히 공유하면서 처음 보는 이와도 금세 말이 텄다. 무엇보다 독한 양주를 연거푸 마시다 보니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맛도 좋고 뭉근히 취하는 칵테일, 너무 마음에 든다.
2. 댄싱 & 싱어송
미국인들은 원래 이런가? 작고한 Avicii의 ‘Waiting for love’가 흘러나오자 망설임 없이 댄스 타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당황… 하지는 않았고. 나야 춤추는 걸 워낙 좋아하는지라. 친구가 새 집에서 쫓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충분히 탕진했다. 몇 개 주옥같은 댄스곡을 알고 있는 림이와 클럽 댄스에 일가견이 있는 몇몇이 들의 리드로.
다들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이 열 시 반. 그러나 오로나민*의 요정이 깃들기라도 했는지 앤써니는 기타를 잡았다. 아‥ 그렇구나 파티는 지금부터였구나. 그의 열창에 다시 신묘한 기운이 샘솟고 술이 마구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몇 번의 열창과 몇 번의 탕진과 몇 번의 비명이 오갔던 것 같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끄러운 기억은 끊어진 필름처럼 사라졌다. 오로나민* 요정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막차를 타러 떠난 것만 떠오른다.
일요일, 숙취와 기약
우리는 언제쯤 벽에 맘대로 못질을 해서 전구를 걸고, 널찍한 거실에 모여 춤을 추거나 우아한 부엌이 갖춰진 자기만의 집을 갖게 될까. 내 조부모님은 사진사로 일하며 십 년을 꼬박 모아 지금의 집을 지었다. 그 와중에 6남매도 키워냈다. 시간이 흘러 2019년이 되었지만 지난 10년 동안 서울의 주택 가격은 15.11% 올랐고, 그동안 대기업 임금은 연평균 4.3% 인상됐다. 십 년을 꼬박 모아도 내 집이 생길지 귀추가 자못 궁금하다. 못질이나 푸근한 다이닝룸은 많은 시간이 지난 뒤의 이야기가 될지도.
어제 파티에서 캘리포니아에서 온 D가 알려준 말이 있다. ‘This is lit(쩐다)!’ 점잖은 수영동 신축 오피스텔에서, 8평이 조금 넘는 친구의 집에서 펼쳐진 난장 댄스파티는 충분히 인생을 낭비할 가치가 있는 '쩌는' 시간이었다. 앤써니가 마침내 쫓겨나지 않고 오래오래 러브하우스에 머물면서, 종종 댄스파티도 열었으면 좋겠다. 자택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춤이나 출 밖에.
At the table
- 앤써니 외 11인
(믿으시라. 여덟 평 원룸에도 충분히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