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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와 '죽겠다' 사이, 낯선 도시의 맛 시니강

3/30 토요일 테이블

by 은재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인사를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 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의 맛이었다. 그것이 아주머니가 주던 마들렌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온 콩브레와 그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 속에서 솟아 나왔다.

_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김희영, 민음사)



산들한 바람을 타고 산업단지에도 봄이 선뜻 다가왔다. 지난 4월에 입주한 뒤로 두 번째로 맞은 강서구의 봄이었다. 한창 여기저기서 진행 중이던 공사도 어쩐 일인지 오늘만큼은 조용하다. 공장, 공사장, 좁고 열악한 도로 때문에 진저리 쳤던 동네지만 익숙한 벚꽃 냄새와 낙동강변에 바람이 살랑 불어오자 나름 정겹게 느껴진다.



이번 테이블은 나처럼 낯선 도시에 사는 이들을 불렀다. 메뉴는 시니강(Sinigang)과 파인애플 볶음밥에 샹그리아. 시니강은 필리핀의 대표적인 가정식으로, 돼지고기나 닭고기, 새우에 각종 채소를 넣고 푹 끓인 찌개라고 보면 된다. 타마린, 레몬, 깔라만시 등 열대 과일즙으로 맛을 내기 때문에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찌개에서 나는 묘한 신맛 때문에 호불호가 나뉘지만, 열대 기후에서 냉장 개념이 없었던 필리핀에서 음식이 상하지 않으면서 몸을 차갑게 식혀주는데 꼭 필요한 가정식이었을 것이다.


시니강을 요리해 줄 내 친구 ‘림’이는 8년간 필리핀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학부까지 수료한 상냥하고 야무진 회계학도다. 어학연수가 아니라 아예 현지인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고 현지인 친구들과 사귀었다는 림이의 특별한 유년이 부럽기도 했다. 학업을 강요하지 않고 자유로운 교육환경, 부잣집 친구들의 파티에 초대받거나 프롬(졸업식 무도회)의 추억을 얘기할 때 특히.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한국에 하루라도 빨리 오고 싶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모를 어릴 적 언니와 단 둘이 낯선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졸업만 하면 한국에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마침내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림이에게 그래도 필리핀에서 그리운 게 있다면 뭐냐고 물었다.


필리핀 대표 가정식, 시니강(Sinigang)이란다.



금요일 퇴근 후, 파인애플 샹그리아 만들어 두기

재료: 파인애플, 포도, 냉동 블루베리 등 산도 높은 과일, 레드와인


샹그리아는 꼭 전날이나, 적어도 두 시간 전에는 만들어 놓을 것을 추천한다. 바로 만들어 먹으면 입에서 과일과 레드와인의 맛이 따로 노는 데다 차갑게 마시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파인애플 볶음밥에 쓸 수 있도록 생 파인애플을 써도 좋다. 샹그리아를 만들 때부터 예쁘게 썰어서, 볶음밥에 넣거나 볶음밥을 담는 그릇으로 쓰면 보기에도 그만이다.


1. 샹그리아를 담을 피처에 파인애플, 포도 및 베리류 과일을 넣기

2. 다른 볼에 레드와인 1병을 넣고 오렌지 주스 1컵 내외로 당도를 조절한다. 와인의 쓴 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당도를 조절한 뒤 손질한 과일과 섞기


토요일 네시 반, 식어도 맛있는 볶음밥부터 만들기

식어도 먹기 좋은 파인애플 볶음밥부터 만든다. 오늘은 두 명이 일손을 도와주기로 했다. 시니강을 만들어주기로 한 림이가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시니강은 간단한 손질을 마친 야채를 끓는 물에 넣고 수프를 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 사람 입맛에 맞을까 싶어 림이는 꽤 오랜 시간 정성 들여 간을 봐줬다. 특유의 향신료와 맛을 유지하면서도 우리 입에 맞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는 현지 오래 살았던 한국인만의 내공이었을 것이다.


이어 내 동생도 크림치즈와 생크림, 오레오 쿠키를 잔뜩 사와 평소 즐겨먹었던 브랜드의 오레오 아이스케이크를 뚝딱 만들더니 냉동실에 차갑게 얼려놓았다.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은 기분.


<시니강 수프>

재료: 새우, 양파, 시금치, 청경채, 토마토, 고추와 필리핀 만능 분말, Kross 시니강 파우더

1. 물을 냄비에 붓고 끓으면 양파와 토마토를 넣어 5~8분간 익히기

2. Kross 시니강 분말 수프를 넣고, 피시소스나 후추로 간 조절하기

3. 청경재, 시금치, 배추, 무 등을 넣어 7분간 팔팔 끓이기

4. 야채가 익으면 쌀밥과 함께 내놓을 것



토요일 여섯 시, 디너 시작

여섯 시가 조금 넘어가니 친구 메간 Meg과 그의 친구 토리 Tori가 도착했다. 메간은 원래 내 친구의 친구로, 미국 올랜드에서 온 초등학교 원어민 교사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사람인 그 역시 나만큼 요리를 좋아하고 좋은 레시피를 많이 알고 있는 데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그 친구와 이 새로운 요리를 나누고 싶었다. 메간과 함께 온 토리는 두 달 전 한국에 정착한 동료 영어 선생님. 내가 만난 두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이고, 활달한 성격에 스타카토가 붙은 듯한 아이랜드 억양이 매력적이었다.


토리는 남아공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고 학년 최우등으로 졸업했지만, 현지 정권이 흑인층 지지를 얻기 위해 인종 역차별 정책을 실시하는 데다 경기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재능에 걸맞은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교육학 학부를 수료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부산의 원어민 교사로 선발되었다. 서울과 부산이 특히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그녀는 2백 시간 이상의 교육을 여러 번 수료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귀엽고 성실해서 가르치는 재미가 있다는 그는 큰 키만큼이나 마음도 넓은 사람이었다.


토요일 열 시 반, 디저트는 남은 와인과 과일

2018년 국내 E2(회화) 비자를 보유한 원어민 교사는 13천여 명으로 부산광역시에서는 EPIK이나 CPIK 등 자체 보조교사 선발,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원어민 보조교사 활용법』따위의 공문서를 보고 있자니 학교는 이들을 교구(敎具)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오랜 거주기간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녹아들지 못하는 ‘무형 주민화’되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생각해보면 현지인과 외국인의 우정은 실패가 예견되었을지 모르겠다. 스스로 터전을 옮기기로 선택한 사람과 머무를 것을 선택한 사람의 성향은 현저히 다른 것이므로. 내가 독일에서, 네덜란드에서, 심지어 서울에서 느낀 이질감은 언어가 원인이 아니었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가 이미 형성된 이들에게 새로운 관계는 하나의 선택인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마련이므로.


차가운 디저트를 떠먹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요리의 수고로움이 노곤하게 풀리는 듯하다. 토리가 서툰 한국어로 ‘수고했어요’라고 하자 웃음이 나온다.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다.

- 그래도 아직 ‘죽겠다’하고 ‘좋겠다’는 구분 못 하겠어. ‘맛있는 거 먹어서 좋겠다’, ‘힘들어 죽겠다’ 같이.


전혀 다른 의미지만, 두 가지 감상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여기 있는 여섯 명은 모두 ‘자리바꿈’이라는 나라에서 살아본 바 있다. 남의 나라에서 내 삶은 특별하다. 친구들은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독일에 머물면서 죽을 것 같은 외로움을 알았다. 아름다운 건물과 경관을 보면서도 이야기 나눌 친구나 가족이 없는 것은 그것을 보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림이가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던 것도 그런 죽을 듯한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겨울이 지나고 완연한 봄이 왔다. 이번 봄은 나도, 내 친구들도 이 낯선 도시 혹은 낯선 나라에서 즐거운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미 시니강 수프를 먹지 않았던가? 앞으로 어디에서 그 수프를 먹더라도 오늘의 테이블이 기억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At the table

A (미국인, 26, 교사)

Meg (미국인, 23, 교사)

Tori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사)

림 (23, 학생)

효(23,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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