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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까, 머무를까? 홍합 스튜와 치즈 그라탱

9/28 토요일 테이블

by 은재

우리는 저녁으로 진득한 화이트 와인 소스 스파게티와 엄청난 양의 마늘빵을 먹었다. 멀리사는 우리 모두를 많이 웃겼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사람에게 뭔가를 먹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보비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웃고 있음을 잘 알았다.

_샐리 루니, 『친구들과의 대화』(허진, 열린책들)




금요일 저녁, 집을 치우며
9년 전, 기말고사가 가까워져 늦게까지 노트를 정리하던 어느 새벽 EBS <하늘에서 본 세계>를 봤다.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촬영한 세계 유수 도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난 똑똑하진 않았지만 아직 열아홉 싱싱한 뇌를 가지고 있어서, 교과서 내용을 빽빽이 노트에 옮기며 암기하던 중이었는데 무심코 카메라에 중앙 유럽의 리히텐슈타인 공국이 비쳤다. 고풍스러운 거리를 뛰어다니던 작은 사람을 보자 똑똑하지 않았던 나도 잠시 존재론적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복 많은 영혼이 전 세계 76억만 인구 중 채 4만이 안 되는 그림 같은 리히텐슈타인에 살고 있는지? 누가 나는 TV 이쪽 편, 저 사람은 저쪽 편에 던져놓았는지? 저 우아한 땅을 내 발로 밟아보리라. 내 열망은 아주 강하고 분명해서, 2년 뒤 생면부지의 튀빙겐 대학교로 방문학생 자격을 얻었을 때도 부모님은 예견한 듯 손수건을 흔들어 주셨다.

이번 테이블에는 어학원에서 가까워진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를 불렀다. 바야흐로 내가 처음 집을 떠났던 그 계절, 공기만 마셔도 가슴이 설레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 네시, 홍합을 손질하며

2018년 전국 20대 인구이동률은 22.4%, 30대는 21.5%를 기록했다. 부산은 빠져나간 인구만큼이나 새로 유입된 인구도 많았고 그 이동자 수는 소폭 증가하고 있다. 오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이제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촌스러울 정도. 특히 부산에서 유출된 인구 중 40%는 18세에서 34세까지 청년층인데, 주변을 봐도 나처럼 태어난 곳에서 직장을 구하는 또래는 찾기 힘들다.

나고 자란 도시에 머무를 것을 선택한 지금, 나는 도전과 변화라는 21세기 새로운 질서를 거스른 것은 아닐까? 왜 누군가에게 자리 바꿈은 설레거나 별 것 아닌 일이고, 누군가에겐 외로움과 걱정거리가 되는지. 내가 다니는 어학원 친구들이 적절한 답을 줄지 모르겠다.

<토마토 홍합 스튜>

재료: 홍합 1kg, 양파, 마늘, 토마토소스 3큰술, 물 2컵, 화이트 와인 1/2컵

1. 양파, 마늘, 고추를 다지고, 홍합은 꼼꼼하게 세척하고 해감하기

2. 냄비에 올리브 오일 두르고, 손질한 야채를 투명하게 익을 때까지 볶은 뒤 토마토소스와 물 붓기

3. 홍합을 넣고, 화이트 와인을 소량 붓고 알코올이 날아갈 때까지 끓이기

4. 후추, 버터, 설탕으로 간 맞추기


토요일 여덟 시, 식사가 시작되는 풍경

풍경은 이렇다. 호주에서 요리학교를 졸업한 H가 셰프를 맡아 스튜를 나눠주고, 디자이너 Y가 나무 도마에 치즈와 청포도를 올리고 있었다(“디자인적 감각을 발휘해봐요”). 식탁에는 미네소타에서 온 원어민 교사 A와 최근 약대 진학을 위해 경북으로 거처를 옮긴 D가 조곤조곤 뭔가 얘기 중이었고, D와 함께 온 연구원 W는 나에게 고향 대구의 억양이 부산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서울 출신 Y오빠는 넌지시 웃을 뿐이었다(“어디가 다르다는 거죠?”). 결국 이야기는 흘러 세계 최고의 미식 여행지는 어디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바뀌었고, 필리핀에서 고교를 졸업한 S의 풍부한 경험과 논리로 태국 방콕이 1위로 선정되었다.


즉 여기는 모두 '자리바꿈'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이 중 최소 네 명은 1년 안으로 스페인, 싱가포르 혹은 서울로 떠날 예정이다.



<치즈 그라탱>

1. 오븐을 200°C에서 예열하고, 냄비에 물을 끓여 파르펠레를 넣고 올리브 오일, 소금 간하여 익히기

2. 팬에 마늘과 돼지고기를 볶아 충분히 익으면 크림, 우유, 치즈를 넣고 끓여 크림소스 만들기

3. 크림소스에 익은 파르펠레 면을 넣고 충분히 뒤섞은 뒤, 내열 용기에 담고 피자치즈를 골고루 뿌리기

4. 오븐에 20분간 덥힌 뒤 치즈가 충분히 녹았으면 완성


인턴십 종료 후 낙성대 근처 자취방을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오던 날 마주친 부산은 좀 이상했다. 이 도시는 혼잡한 시내와 버려진 나대지가 뒤섞여 있었는데,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까만 밤바다 때문에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했다. 적막한 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부모님의 까만 뒤통수를 보니 나는 더 이상 이곳에만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부모가 가보지 않은 곳과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해보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알고 있었다. 발견이란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던 프루스트의 말처럼, 내가 거처를 옮긴 곳은 고향이 아니라 '부산' 그 자체였으며, 이제부터 나만의 온전한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토요일 열한 시, 롤케이크를 먹고 나면 막차가 끊기기 전에

생각해보면 이들은 스스로 터전을 바꾸기로 한 사람인데 반해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우정은 처음부터 안될 결말인지 모른다. 모험과 혁신이라는 21세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뒤로 가기를 누른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자리한 철물점이 카페로, 나대지가 무대로 변모하는 도시를 보고 있다. 자전거 도로가 확대되어 3시간 이상 해안가를 라이딩할 수 있는 도시에 살고 있다. 제자리에서도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자리바꿈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내게도 자리바꿈은 너무나 그리운 고향이다.


At the table

- 회화 스터디 ‘컬쳐컴플렉스’ 8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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