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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들을 힘나게 하는 들깨 크림 파스타와 홍합 와인 찜

9/21 토요일 테이블

by 은재

그가 러시아 태생임을 알고 나서는, 청어와 보르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싫어하던 보드카를 단숨에 털어 넣을 줄도 알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모두들 그가 즐겨 앉던 식탁이며 그가 먹던 음식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_카롤린 봉그랑, 『밑줄 긋는 남자』(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내 고용계약서 상 연봉에 하루 2시간 초과근무 수당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어쩐지 동일 직군 대비 급여가 나쁘지 않다 싶었다. 보통의 경우 여섯 시 안으로 퇴근하기 때문에 실제로 하루 열 시간씩 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조항에 대해 전혀 읽어본 적도 없거니와 동의하지도 않는다, 고 하지만 체크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는 회원가입 페이지를 보듯 끄덕끄덕, 인사팀장 앞에서 서명을 했던 기억이 있다.


크게 문제 만들지 않으면 꾸준히 다닐 수 있는 회사에서 (아직까지는) 혼자 살기 부족하지 않는 급여를 받고, 토요일에는 4명 이상의 친구를 불러 저녁도 함께 먹을 수 있다. 다만 매달 장기근속 표창장을 받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 하면 내 앞길의 귀추가 자못 궁금해지기는 한다. 지난달 30년 근속 포상을 받은 반장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9년부터 조립라인을 담당했다고 한다. 30년간, 조립을, 담당하셨다고. 내가 후일 근속 포상을 받는다면 모두들 놀라며 이렇게 말하겠지. “30년간, 엑셀 파일을, 만들었다고?”


물론 빅데이터니 스마트워크 시스템이니 하는 것이 내 일자리를 앗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토요일 4시, 홍합 손질

헤밍웨이는 굴과 송어 등 해산물 애호가였으며 미식가였다. 가을이 되니 꼬막, 바지락, 홍합 등 조리도 쉽고 맛 좋은 해산물들이 조금씩 맛보기로 시장에 나오고 있었다(부산에서 조개류는 10월 중순이 가장 싱싱하다). 1인 가구에게 굴과 송어는 과하기도 하고, 싸지만 확실한 행복을 보장하는 홍합탕을 끓여 친구들을 불렀다. 헤밍웨이까지는 아니어도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 타투이스트와 에세이스트를.


탕을 끓이든, 와인을 조금 넣어서 찌든 간에 홍합은 사전 손질이 가장 중요하다. 두 번 이상 헹구고 홍합끼리 뽀독뽀독 문질러 껍질에 붙은 자잘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질긴 족사도 손으로 꼼꼼히 떼어내야 한다. 불순물이 섞여 들어간 비리고 쓴 데다, 팔팔 끓여 한번 입을 벌린 홍합에서 족사를 다시 떼어내기는 어렵다. 마트에서 산 홍합도 마찬가지로 손질이 필요하며, 이는 지난날 가족에게 해준 홍합탕의 실패에서 배운 꿀팁이니 손질에 시간을 들일 것.


5시, 들깨 크림 파스타 만들기 (4인분)

재료: 파르펠레, 표고버섯, 대파, 소금, 후춧가루, 멸치액젓 1작은술, 마늘, 생크림 1컵, 들깻가루 2큰술

1. 버섯과 대파는 송송 채 썰고, 마늘은 편 썰어 사전 준비

2. 식용유를 두른 냄비에 마늘, 대파를 넣고 살짝 익을 때까지 볶은 후 버섯을 넣어 숨이 죽을 때까지 덮이기.

3. 2에 생크림을 넣어 한소끔 끓인 후, 끓어오르면 멸치 액젓과 들깨가루를 넣고 한번 더 끓이기.

4. 손님이 올 때 즈음이 되면 다른 냄비에 물을 끓이고 파르펠레를 넣어 12분간 삶기.

5. 그릇에 파르펠레 면을 담고, 버섯 들깨 크림을 자작하게 올려 완성


6시, 손질한 홍합에 와인과 물, 홍고추를 넣어 끓이면

동글동글한 베이비 페이스로 기합 넘치는 블랙 앤 그레이 타투를 새기는 Y와, 사랑과 영화를 주제로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 J 씨가 테이블에 왔다. 나인 투 식스(9시 출근 6시 퇴근) 삶을 살아가는 나와 달리 이들은 프리랜서 아티스트. 글자 그대로 자유로운 시간, 자유로운 업무환경, 자유로운(!) 소득 생활자에게서는 어딘가 낭만이 느껴진다. 주체성과 신념 혹은 여유의 아름다움이. 이 삶을 조금이라도 훔쳐보고 싶어 초대한 속셈도 있다.


옆에서 간이 짜다며 직설적인 논평을 내놓는 타투이스트 Y는 그 직업만큼이나 태생도 특별하다. 강원도 삼척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일찌감치 학교에는 뜻이 없었다. 수업 도중에 자꾸 조는 바람에 교실 밖으로 쫓겨나기 일쑤였는 데다 차라리 맘 편히 잘 수 있어 그 편이 좋았다고. 자꾸 몰려드는 졸음 때문에 엄마에게서도 직장에서도 구박을 받곤 했는데, 지난해 정신의학과에서 정식으로 ‘기면증'을 판정받으면서 오랜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게으름뱅이라는 지난날의 오명이 억울하겠지만, 오히려 낮에 일하기 힘들다는 특성 때문에 프리랜서 타투이스트의 길에 매력을 느꼈을지 모른다. 2015년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신직업 육성계획’의 17개 신직업 중에는 ‘문신사’가 포함되어 있다. 전 세계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이 문신을 의료행위로 규정하고 있지만, 지난해 일본에서 의사 면허 없이 타투를 시술한 타투이스트가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사실 상 한국이 유일무이해졌다.


물론 법이야 뭐라든 Y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기면증 예방제를 먹고, 예약 시간에 맞춰 문신을 새기고, 자투리 시간에 도안을 창작한다. 조금도 ‘free’ 하지 않은 프리랜서 생활 속에서 영어 학원까지 다니면서 국제 대회를 목표로 하고 있는 그. 꿈을 이룰 때쯤 대필작가로 그의 일대기를 써줘야지. 그때까지 문신이 합법화되어야 출판이 될 텐데.

7시, 디저트는 오전에 구운 다쿠아즈와 무화과

오전에 만들어 둔 다쿠아즈를 디저트로 내놓는다. 작가가 되려면 하루키처럼 재즈바 까지는 아니더라도 빵집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제과기능사 수업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미적 감각에 큰 결함이 있는지라 같이 온 J 씨가 정갈하게 진열을 도와주었다. J 씨는 여러 번 만났지만 얘기할 만한 바가 없다. 말을 하기보다 듣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만 어떤 굳은 결심으로 제대로 글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과 영화를 아주 많이 보고 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루키의 재즈바는 아니어도, 이 테이블이 끝나고 그도 어떤 영감을 얻었을까?


프리랜서 free-lancer는 원래 어떤 영주에게도 소속되지 않고(free) 활약하는 창병(槍兵, lancer)을 뜻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긴 창을 들고 제일 먼저 돌진하는 그 병사 말이다. 승마와 돌격이라는 단순한 기사 계급의 전투술에 비해 장창과 석궁이라는 전문 무기를 든 이들은 중세 영주 사이에서 최고급 용병으로 통했다.


지금의 나는 모범시민을 자처하며 초과 수당이 포함된 월급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지만, 이는 중세시대 기사처럼 말 한필에 돌격술만 가지고 담 높은 성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키와 헤밍웨이, 그리고 내 두 친구가 부러운 것은 그들이 자유라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창과 방패, 특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손질을 잘했는데도 홍합탕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그럴 것이다.

at the table

Y (27세, 타투이스트)

J (32세 추정,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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