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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Apr 30. 2021

아가씨와 술

레시피 화양연화 #4 수란 샐러드

1. 아가씨


‘저기 앞에 가는 아가씨 따라가요.’


내 뒤에서 길을 묻는 방문객에게 경비아저씨가 외쳤다. 아가씨, 아가씨… 고작 서른 살이고 서류로는 스물여덟 살이라 큰소리치긴 했지만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전국의 아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노숙한 외모로 신입사원 때는 ‘경력직인가?’ 이직을 하니 ‘과장급인가?’ 소리를 들었던 바. 요즘같이 야근이 이어지는 날이면 그 행색 더욱 남루하여 행여 그 방문객이 ‘아가씨? 어디요?’ 할까 조마조마했다.


연 4회 세금신고 기간이 오면 재무팀 대리는 평일 2시간 야근에 주말 출근을 불사한다. 그나마 이번 분기는 쉬운 편이다. 팀장이 공석이라 다른 업무가 들어오지 않았다. 입사 초부터 나와 일했던 팀장은 얼마 전 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고 퇴원하셨다고.


 ‘퇴원을 하셨다고요?’ 그렇게 됐어, 하며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악수를 건넸다. ‘잘 챙겨야 한다 너.’ 우악한 힘으로 흔드는 그에 비해 뜻밖의 소식에 얼이 빠져 악수하는 팔이 덜렁거렸다. 내 첫 여팀장, 그 사람 때문에 출근이 싫은 날도 많았지만 냉철하고 배울 점이 많은 엄연한 선배였다. 그가 떠나고 옆자리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여자가 사회생활 오래 하기 쉽지 않지.’


20년간 근속하고 이틀 만에 떠난 선배를 마중한 뒤 야근을 이어가는 일상. 회사라는 드라마의 결말을 훔쳐본 기분이다. ‘이게 다야?’ 같은 질문을 되풀이할 때쯤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업무 시간을 쪼개 방문한 나를 반겨준 트레이너 제니가 와이드스쿼트의 강도를 높였다. 땀이 줄줄 흐르고 잡생각이 사라졌다.



 제니가 뒤로 다가와 거울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 뒤에서 스트레칭하시는 분 보이죠? 저분도 원래 은재님하고 체형이 비슷했는데 2월부터 준비해서 저만큼 뺐어요.’ 체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배 둘레, 탄탄한 근육질 팔다리에 피부가 반짝이는 아가씨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저 몸을 두 달 만에 만들었다고요?’

제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해요.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로 하루 4시간 운동하는 피트니스 에이스.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보살피는 팀장. 잠시 쉬자는 제니의 팔목을 붙잡았다. ‘트레이너님, 저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이 드라마의 결말은 로맨틱 코미디여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될 게 뻔했다.




2. 술


 황주임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가 실수를 거듭하는 통에 야근하기를 여러 차례. 아예 본사로 불러 업무 절차를 다시 알려주기로 했다. 신입사원이지만 나보다 5살쯤 많다는 그를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비타 500을 한 박스 사온 황주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인수인계 내용을 받아 적었다. 처음만큼 그가 밉지 않았지만 순한 성품을 보니 이 쪽 일이 잘 맞진 않을 테다. 친절한 재무팀 직원은 해피콜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어서 그를 내쫓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밖을 나서던 황주임이 다급하게 문짝을 잡았다.


‘대리님… 저, 그, 개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황이 목소리를 낮췄다.

‘네?’

‘아버지께서 퇴직금으로 임대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간이과세자 하고 일반과세자 중 어떤 게 좋을지요….’


이런 재밌는 얘기를 왜 이제 꺼내는 거예요?

그의 팔을 끌어 회의실로 데려갔다.


‘연 임대수익이 4,800만 원 이하면 간이과세자로 등록해요. 과세율이 10%인 일반 과세자에 비해 간이 과세자는 부가가치율을 매긴 뒤 과세하기 때문에 세금이 적거든요. 단, 중심 상업지역은 매출과 관계없이 간이과세 배제하니까 주의하세요. 부동산 구입할 때 대출은 받으셨나요?’

‘예… 받으실 예정입니다.’

‘대출이자는 임대사업소득세 신고할 때 경비로 인정되니까 장부 신고하시고요.’


황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는 인사를 거듭했다.


‘대리님 고맙습니다… 세무사 찾아가자니 비용이 들까 봐 속앓이를 했거든요.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거예요.’

‘뭘요. 어서 가세요.’


그를 마중하고 들어오는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에 미소가 있었다. 빌어먹을, 이런 데서 뿌듯하면 안 된다고! 팔자 고치기가 이렇게 어렵다. 세금 신고를 마무리하는 날, 야근도 잦았겠다, 운동도 계속 나갔겠다, 오늘은 들어가서 맥주나 한 잔 할까? 안주는 가벼운 샐러드에 수란 얹어서.

 


아보카도 수란 샐러드


- 아보카도 1/2, 계란 1, 양송이 3송이


1. 냄비에 물을 붓고 끓기 시작하면 식초와 오일을 한 바퀴씩 두른다. 젓가락으로 냄비 한가운데를 저어 소용돌이를 만든 뒤, 미리 깨어둔 달걀을 붓고 2분 30초 간 익힌 뒤 국자로 모양을 잡아 건져 올린다.


2. 양송이를 기름 약간 둘러 굽고, 아보카도 반개를 썰어 접시에 깐다.


3. 접시에 호밀빵-아보카도-버섯-수란 순으로 쌓아 올린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려다 숨이 턱 막혔다.

흘끔 본 달력에 4월은 찢겨 사라지고 ‘고향연화’로 돌아가기로 약속한 5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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