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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Aug 07. 2020

만두박사, 지도교수를 정하기로 결정하다

이제 진짜 빼도 박도 못 합니다.

이달 초, 지도교수를 정했습니다.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다니는 토론토 대학교는 지도교수를 정하는 것을 흔히 우스갯소리로 "Asked him/her out"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다/고백하다)이라고 많이들 부릅니다. 그가 나를 승낙을 할까? 혹시 거절하진 않을까? 하며 마음 졸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보는 다른 학생들이 "이미 너를 좋아하는 게 확해! 얼른 말해봐!" 하며 바람을 넣는 모양새(...)가 마치 이성에게 고백을 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랍니다.


이는 토론토 대학교 정치학부는 코스웍을 모두 끝낸 후 학과 교수님들의 싸이즈를 어느 정도 가늠한 후에 학생들이 지도교수를 찾아 나서도록 하기 때문이랍니다. 풍문을 듣자 하니 박사과정 지원 전에 지도교수에게 먼저 연락해 교감을 나눈 후 지원해서 아예 초장부터 지도교수를 점찍고 들어오게끔 하는 학교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만, 이쪽은 그런 분위기가 좀 덜한 편입니다.


그렇기 땜시롱, 저처럼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부탁하는걸 몹시 어려워하는 학생들은 코스웍을 모두 끝내고 지도교수를 정하는데 어느 정도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 일 겁니다.




지도교수를 정할 때 유의할 점이 있다면...


지도교수를 정할 때 어떤 점을 생각해야 할까요? 학부 내에서 알음알음 전해지는 남의 피눈물 지도교수 선택 비기를 정리해봤습니다. 후술 하겠지만, 사실 저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전광석화와 같이 지도교수님을 정한 관계로(...) 제가 직접 당한 케이스가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1) 교수가 정년교수인지 확인하자


정년교수만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정년교수가 아닌 교수님한테 지도교수가 돼 달라고 조르면 우울해합니다. 우리 비정규직끼리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정년을 보장받은 정규직(...) 교수님들에게만 조르도록 합시다.


2) 적어도 한번 이상은 얼굴 보고 연구 관심사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자


적어도 한번 이상은 관심이 가는 교수님과 함께 얼굴을 보고 연구 관심사에 대한 썰을 풀어보는 게 좋습니다. 이게 중요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답니다. 하나는 지도교수님의 연구 관심사와 당신의 연구 관심사가 어느 정도 접점이 있어야 지도교수님이 흥미를 가지고 학생의 논문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쏟아주기 때문이랍니다. 아예 접점이 없다면 아무리 명망이 높은 교수님이더라도 지도의 질이 좀 떨어질 수밖에 없답니다.


다른 하나는 만약 연구 관심사에 접점이 없더라도, 적어도 논문 프로젝트에 당신이 생각지도 못할 좋은 조언을 해 주시거나, 아니면 당신의 연구 프로젝트에 더 알맞은 교수님을 추천해 주시기도 합니다. 교수님이 귓동냥으로 듣고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하며 멘델레이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황금 같은 관련 논문을 던져 주시기도 한답니다.


얻을 건 참 많은데 잃을 건 쪽팔림 말곤 별로 없지요? 고로 한번 학과에 당신의 연구과제와 접점이 있는 교수님들을 죽 투어 해 보시길 권합니다.


덧: 교수님들을 투어하기 전에 지도교수님이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에 어떤 연구를 해 왔는지 스캔을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내 연구과제와 교수님과 접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연구 방법론과 교수님이 찾는 연구 방법론이 어느 정도 호환이 되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학철학적 접근에서 서로 어긋나기 시작하면 좀 많이 고통스럽습니다. 두 연구자의 연구 세계관이 어긋난다는 뜻이니까요.


3) 다른 학생들에게 교수에 대한 평판을 물어보는 게 좋다고 하더라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지만, 참 그런 사람들도 없잖아 있지요? 교수님들도 똑같답니다. 정말 좋은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상종하기 싫은 분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상종하기 싫은 양반들과 상종할 필요는 없으며, 그런 양반들은 좀 능동적으로 거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들과 관심분야를 공유하는 미팅은 그 교수님의 성향이 어떤지, 혹은 그 교수님들이 지도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스스로 알아내기엔 좀 많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초장엔 멀쩡했던 양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는 교수님들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윗 학년 선배들에게 교수님들에 대한 평판을 좀 주도면밀하게 뒷다마를 깔 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학과 행정실에서 슬그머니 권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수가 학생들의 연구성과를 자기 걸로 채 가는지, 어떤 사람이 기분에 휘둘려 학생들에게 험악한 말을 쏟아내곤 하는지, 어떤 교수가 학생들 졸업을 안 시켜주는지, 어떤 교수님들이 박사논문 챕터 리뷰 해 주는데 한세월이 걸리는지... 등등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성추행 문은 없는지, 연구실 안에서 학생을 왕따 시키거나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진 않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졸업을 할 때까지 당신을 책임 질 사람이니까요. 나쁜 사람과 일하기보단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게 좋습니다.




만두박사, 지도교수에게 연락하기로 결정하다


그런데 저는 위에 나열한 주의사항이 민망할 정도로 지도교수를 좀 얼렁뚱땅 정한 편입니다. 연구조교로 배정받은 교수님이 제 연구분야와 완벽히 겹친 분이었거든요 (물론 겹쳤기 때문에 배정이 됐을 겁니다). 저는 미얀마를 중심으로 내전과 평화협상 과정을 공부하고자 했고, 그분은 동남아 전문가로 수년 전부터 미얀마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필드 리서치를 하며 미얀마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책을 공동 집필하던 도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양반의 연구와 제 연구의 접근이 확연히 다르긴 하지만 (다름을 넘어서 아예 미얀마 평화 프로세스를 보는 시각 자체가 아직까진 상반되는 편입니다), 일단 미얀마에 대한 관심이 일치하는 게 굉장히 큰 플러스였습니다. 지도교수로 서 주신다고 확정되기 전에도 제 논문 주제를 잡는데 큰 관심을 쏟아주시는 것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뻘짓을 하면 잘 잡아주겠다는 신호였으니까요.


먼저 논문을 쓰기 시작한 친구들에게 그 교수님에 대한 평판을 여러 번 캐보며 크로스 레퍼런스를 시도한 바, 굉장히 빠릿빠릿하게 학생들을 잘 챙기는 교수님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직도 연구성과를 뿜어내며 현역 박사생마냥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로 필드 리서치를 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콩깍지 제대로 꼈습니다. 이 사제관계는 운명인가 봅니다. 제가 지도교수 후보군에 넣었던 몇몇 교수님들과는 다르게 이 양반은 다시 생각해보라며 말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다른 학생들이 지도교수를 채가기 전에 얼른 고백(?)하라며 바람을 슬슬 넣기 시작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논문지도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만두박사, 지도교수에게 고백하다


이런 일은 얼굴 맞대고 직접 요청하면 좋은데 코로나 19 덕에 얼굴을 맞대고 미팅을 하면 둘이 만나 하나가 나자빠질걸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메일을 닦아 보내기로 합니다. 이메일을 썼다 지웠다, 오탈자는 없을까, 문법은 잘 맞았을까 전전긍긍하며 이메일을 갈고닦길 수일, 길일을 잡아 숨을 꾹 참고 전송 버튼을 누릅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만두박사입니다. 코로나 19가 만연한 이 계절에 안녕하신지요...

[중략]

다름이 아니오라 제 박사논문 지도를 요청드릴 수 있을까 하여 이메일을...

[생략]

몹시 감사합니다, 만두박사 드림"


뾰로롱. 교수님께서 몇 시간 만에 답신을 내려보내셨습니다:


"어 그러지 뭐. 어차피 만두박사 연구주제는 내가 잘 아니까. 근데 나 지금 가족들이랑 퀘벡 별장에 있어서 인터넷이 잘 안돼. 토론토에서 자세히 얘기하자. 쏘리! -나의 iPhone에서 보냄"



며칠간 갈고닦은 이메일이 민망해질 정도로 교수님의 짧고 간결한 승낙. 그렇게 저는 지도교수님을 정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합니다. 만두박사의 박사논문은 어떻게 될까요?


과연 졸업은 할 수 있을까요?


3년 후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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