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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Aug 11. 2020

박사과정 전공시험을 치던 날

세상에, 이 짓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박사과정을 밟으면 적어도 한 번은 친다는 바로 그 시험


아버지가 지하실에 마련해주신 취조실... 이 아닌 공부방입니다. 몇 달간 여기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ㅎ_ㅎ

전공시험(Major field examination)이란 전공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세부적인 종목에 대한 깊이, 그리고 전공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 보유 여부를 시험하는 시험이라고... 합디다. 개인적으론 그냥 루키 헤이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봐야겠습니다.


가령 비교정치학이라면 국가론, 정체성, 집단행동, 폭력, 정치 경제, 연구방법론 등등 정치학계에서 단 한 번이라도 학자들끼리 좀 심하게 멱살을 잡았다 싶었던 부분은 모두 전공시험에 어떻게든 나오는 것이지요. 이러한 정치학계의 핵심 논의 내용을 숙달하고, 그에 기반한 나 자신만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시험 통과를 위한 최소 요구사항입니다. (물론 시험 치고 다 까먹습니다)


물론 학생들 혼자서 책과 씨름하는 건 아니고, 나름 체계를 가지고 학생들이 전공분야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나름 세심한 케어(?)를 해 주는 편입니다. 토론토 대학교 정치학부의 경우 전공 범위를 폭넓게 아우르는 코어 코스를 두고, 학생들이 이 세미나 코스를 수강하며 자연스레 전공시험 준비를 하게끔 합니다. 물론 채점하랴, 가르치랴 생업에 치여서 실제로 전공시험만 붙잡고 공부하는 시간은 2-3개월이 채 안됩니다만, 그래도 세미나 전에 할당된 논문을 어떻게든 읽게 되니 시험 전에 전공분야에 대한 적어도 어렴풋한 이해와 의견을 가지게 된답니다.


토론토 대학교 정치학과의 전공시험은 모두 에세이 형식으로, 4-5시간 내에 에세이 문제 몇 가지 중 3개를 골라 그에 대한 대답을 요령껏 잘 써내면 됩니다. 시험 문제는 보통 답안을 작성할 때 수개의 전공 세부분야, 그리고 타 전공의 연관 분야를 모두 거론하게끔 아주 악랄(?)하게 짜여 있습니다. 


가령 국제관계학 전공시험이라면 아래와 비스무리한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것이죠: 


- 국제정치이론의 흐름을 패러다임으로 나누는 행위의 적절성에 대해 논하라.

- 국제정치이론은 내전 연구에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논하라.

-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은 집단행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주장에 대해 논하라.


국제정치이론과 패러다임을 논하고자 할 경우 과학철학, 국제정치이론의 흐름, 그리고 그걸 비평하고 저만의 주장을 개진하기 위한 몇가지 세부 분야를 거론해야 좀 읽어볼 만한 답안이 나온답니다... ㅎ_ㅎ 참... 그렇죠? 근데 공부하면 어떻게든 글이 써지더라구요. 


토론토 대학교는 이와 같은 전공시험을 주전공 한번, 부전공 한번 총 두 번을 보게끔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비교정치학을 주전공으로, 국제관계학을 부전공으로 삼아 시험을 쳤습니다. 미국 어디는 한 번만 보고 다른 하나는 구술시험으로 진행하거나, 아예 코스워크로 때우는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공시험을 치른다는데 우리 정치학과는 시대의 흐름에 좀 뒤처진(...) 편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각 시험엔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며, 두 번을 시도해 두 차례 모두 낙제하게 되면 박사과정에서 나가야 합니다. 가끔 아주 아깝게 두 번 낙제한 학생들의 경우 두 번 떨어져도 패자부활전 구술시험을 치게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제 주변엔 구술시험까지 갈 정도로 운이 나빴던 친구들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너에게 허락된 기회는 단 두 번" 이라는 말이 어찌나 큰 압박인지, 절대 대다수의 학생들이 어떻게든 첫 시기에 전공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답니다. 


글을 다 쓰고 덧붙이는 여담입니다만, 학생들을 오랫동안 가르친 교수님들과 학생들을 곁에서 오랫동안 관찰하는 행정담당 분들의 말에 의하면, 시험을 두 번 다 떨어져서 쫓겨나는 사람들은 몹시 드물다고 합니다. 보통 시험을 이유로 중간에 포기를 하는 학생들은 시험을 앞두고 압박을 못 이겨 계속 시험을 미루다 제풀에 지쳐 나가는 경우가 아니하면, 전공시험 첫 시도에서 낙제한 후 상심이 커 "박사가 내 길이 아닌갑다," 하며 포기하는 학생들이 절대 대다수라고 합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두 번 다시는 하기 싫다고 하는가


시험을 잘 보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공부법이 다르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공부하는 모양새도 제각각입니다만, 저는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며, 영문을 읽는 속도도 좀 느린 편이고, 또 석사를 끝낸 후 한참 일하다 다시 학교에 들어와 경력단절(?)이 있었기 때문에 무식하게 버티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모든 걸 읽고 (세미나 준비는 훑어도 되지만 전공시험은 훑으면 큰일 납니다), 저자의 주장을 아래 사진과 같이 정리한 후, 각 저자의 주장과 저자의 이름 (그리고 머릿속에 어느 주장이 먼저인지 이해하기 위해 저술 연도를 같이 외웁니다. Waltz 1979, Mearsheimer 1995, Kalyvas 2006 등등)을 암기합니다.


요런 식으로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끼리 노트를 만들어 서로 돌려본답니다. 대충 2-300여 쪽만 외우면 되니 분량은 사실 적은 편.


아니 박사도 암기해? 하고 묻는 친구들이 많습니다만, 암기해서 바로바로 주장을 떠올리지 못하면 짧은 시간 안에 문제를 읽고 나만의 주장을 개진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또, 보통 전공시험에서 떨어지는 학생들은 답안이 구려서 떨어진다기 보단, 생각의 흐름이 막히던, 시간이 부족하던 답안을 다 쓰지 못해서 떨어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암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후 핵심 저자들의 주장을 모두 나열해 그 분야 내 큰 담론의 흐름을 잡고, 그 담론에 대한 나만의 시각과 주장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도록 충분한 사색(...)의 시간을 가집니다. 전공시험의 경우 혼자 공부하기보단 함께 세미나를 들은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술 한잔 땡기면서 서로의 시각과 주장을 듣고, "정치현실주의는 실증주의의 노예다!" "실증할 수 없는 주장은 헛소리일 뿐이다!" 식으로 서로 고성을 교환하며 네놈은 강단 정치학의 꼭두각시일 뿐이야 멱살을 몇 번 잡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2019년 늦봄, 비교정치학의 거대담론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시험기간에 코로나 19가 창궐했기 때문에 전공시험 준비하는데 평소보다 더 고생이 심했던 대학원생들이 참 많았을 겁니다. 사실 저자들을 무식하게 암기하는 건 공부량의 1/3 정도고, 주제를 이해하고, 나만의 시각을 가지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는 게 공부량의 2/3인데, 이걸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며 멱살을 잡아야 했거든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얼굴 맞대고 해야 할 공부가 모두 온라인으로 옮겨져 (저를 포함해) 혼자 고독히, 지독한 자기부정에 시달리며, 공부를 했던 학우들이 많았을 겁니다.




시험, 답안 작성, 송고, 그리고 기다림


국제관계학 전공시험 직후의 참상. 코로나 19 덕에 오픈북 시험을 쳐서 비교적 수월하게 두 번째 시험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칩니다. 준비를 잘했다면 시험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시간제한이 아주 스릴이 넘쳐서 그렇지, 각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떤 논쟁이 오고 갔는지는 한 10-15분 정도 말문이 막혀 멍 때리고 있으면 보통 자연스레 떠올려지기 때문이지요. 문제를 가만히 읽은 후, 시험문제가 언급한 논쟁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평가, 또는 주장을 하는지만 가만히 생각해서 글로 옮기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국제정치이론은 내전 연구에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논하라."


의 저의 주장은 대충 "냉전 후 국제정치이론이 내전 연구에 응용되어 전쟁 개시와 평화 이론 등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주류 국제정치이론의 국가주의적 시각은 폭력, 내전 경제, 후견주의 등 내전의 미시적인 부분을 규명하기엔 몹시 부족함 제발 붙여주세요~"이었습니다. 보통 1000-1200 단어 사이에서 글이 나오기 때문에 빠릿빠릿하게 쓴다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걸 가까스로 글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딱 적절한 시간이 나옵니다.


시험을 끝마치면 학과 건물에 남아계신 교수님들이 "축하한다. 할만했지?" 하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줍니다. 역병이 창궐하지 않았으면 시험을 끝낸 친구들끼리 모여 시험에 대한 불안감을 최대한 털어버리기 위해 근처 맥주집에 가서 부어라 마셔라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 후 뿔뿔이 흩어져 각자 골방에 웅크려 앉아 시험 결과를 기다립니다. 


사실 제일 힘든 건 4-5시간짜리 시험을 친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끝낸 후 시험 통과 여부를 기다리는 3-4주를 기다리는 게 제일 고통스럽습니다. 개인 편차가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시기에 박사 과정생들이 대부분 겪는 가면 증후군 증상이 피크를 치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떨어졌으면 어떡하지?"

"아 그걸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었나?"

"햐 이거 떨어지면 이걸 또 어떻게 다시 공부하냐"


등등의 생각이 이 시기에 시험 응시생의 머리를 가득 채우며 3-4주 간 멘탈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답니다. 사실 응시생 절대 대다수가 통과하는 시험입니다만... 만사가 다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주변에 첫 빠따에 떨어져 두 번째에 가까스로 붙은 친구들이 몇 명 있어서 긴장을 좀 더 빡세게 한 편이었습니다.




교수님 가라사대, 대학원생이여 고개를 들라 이제 더 이상 시험에 들지 아니할지니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결과를 알리는 이메일이 언젠가 오게 된답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위와 같은 이메일이 뾰로롱 도착합니다. 5월 중순에 시험을 쳤는데 7월 5일에 결과를 알려줬네요. 저 이메일이 말하는 시험은 제 첫 전공시험이라 심장 떨려 두 달 내내 일이 손에 안 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이메일과 별개로 시험 답안에 대한 피드백이 따로 종이 우편으로 전달됩니다. 사실 근데 시험은 통과하면 땡이라 피드백은 그냥 보는 둥 마는 둥 합니다. 가끔 채점하신 교수님들이 시험 답안에 달아준 코멘트 보내줄까? 하면서 여쭤보실 때가 있는데, 시험이 끝난 후 답안을 보는 건 플래시백과 이불킥을 유발할 수 있으니 가급적 정중히 거절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짓을 두 번 하면 박사과정생들이 제일 많이 때려치우는 구간이라는 논문 제안 단계가 남는답니다.


산 넘어 산이죠? ㅎ_ㅎ 논문 제안 단계에 대한 썰은 다음 기회에 제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당해보고 차차 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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