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집 아들이 한 목숨 멋지게 바쳐 불사를 수 있는 시대는 흔치 않디. 내래, 일본군이랑 싸운 게 현실적으로 이길 희망이 있어서 싸운 가갔어? 옳은 일에 목숨 바칠 기회가 주어졌으니 기꺼이 싸웠던 거디.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옳은 일 아니었간디?
굽시니스트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 <멀리서 온 노병> 中
오늘의 이야기는 상하이에서 시작합니다.
이곳입니다.
현재 발견, 보존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상하이 황푸구, 신티엔디역에 인접해 있습니다. 평범한 도심 연립주택단지에 위치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은 일제의 공작과 임정 내 분열이 깊어져 임시정부 재정이 곤궁해지기 시작했던 1926년에 입주해, 1932년까지 쓰였다고 합니다.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야 보이는 그곳엔 빨랫줄에 옷가지가 즐비하고, 밥 짓는 연기가 자욱합니다. 쇼핑몰, 고층 주거지가 밀집한 신티엔디에 임시정부 청사 구역만 유난히 저층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보존가치, 그리고 그 의의를 존중해 줘 보존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무심코 걷다가 지나친 한 주택 앞에 태극문양이 박힌 문패가 박혀 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지어 그 문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들을 앞세워 입장합니다. 찜솥 옆에 앉은 반대편 집 할머니가 그 북새통을 구경하며 얼굴에 활짝 웃음이 져 있습니다. 혹시 여운형의 그 멋들어진 콧수염을 직접 보시진 않았을까? 싶은 노인의 이마엔 주름이 깊었습니다.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 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사실 상하이 대한 임시정부 청사는 아름다움보단 안타까움이 짙은 곳입니다. 이곳에 입주할 시절 임시정부는 월세도 제대로 못 낼 정도의, 어쩌면 이름만 간신히 남은 초라한 단체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한독립투쟁사에서 이 건물에 얽힌 이야기는 무엇보다 처절함이 눈에 보입니다.
이 청사 건물 2층에서 김구는 본인이 곱게 죽지 못할 것이고,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선 두 아들들에게 전할 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임시정부를 지키던 사람들은 급기야 독립투쟁을 위해 테러, 암살 중심으로 투쟁노선을 정하고 대한 애국단이라는 결사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김구를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한 사람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혁명 수단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일제 고위인사 암살 기도를 통해 그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음을 알리려는 생각이었겠습니다만, 비틀어 보자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결사단원들을 하나하나 희생시켜 독립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지겠다는 결심을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웃자, 즐겁게. 대한 독립 만세- 해 봅시다" 영화 <암살> 中
이곳 주방에서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능숙했던 이봉창이 술을 마시다 취해 주변 직원들에게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왜 천황을 죽이려 하지 않습니까?" 라 물었습니다. 한국어가 너무 어눌해 한동안 일본인 밀정 의심을 받기도 했던 이봉창은 대한 애국단의 결사단원으로 일본 천왕 암살을 기도하다 검거돼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상하이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20대 청년 윤봉길도 이 청사를 찾았습니다. 아마 어깨에 배추 바구니를 메고 이곳의 대문을 두드렸을 윤봉길은 김구를 만나 이봉창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간청했습니다. 훙커우 공원에서 열릴 일제의 상하이 점령 기념행사를 공격할 것을 지시받은 윤봉길은 거사 이틀 전, 공원을 미리 답사한 후 가족에게 보낼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남겨질 아들 둘에게 아래와 같이 전했습니다: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그 외 서로를 동지라 부른 수많은 애국자들, 언 손에 입김을 쏘이며 만주와 상하이를 왕복했던 얼굴 없는 연락원들, 전차 검표, 공장일, 행상 일을 하며 한 푼 두 푼 아껴 모아 의사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보탠 상하이 동포들도 손으로 밥 짓는 연기를 휘젓고 빨랫감을 헤쳐가며 이곳을 찾았을 것입니다.
본인들이 목숨보다, 경제적 안락함보다 더 중하게 여겼던 그 무언가를 가슴속에 소중히 안고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폭력이나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 개인의 감정과 믿음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학자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흔치 않았습니다. 지금껏 실증주의 중심으로 꾸려진 정치학계에서 감정, 또는 믿음을 진지하게 보지 않았거든요. 이는 감정이나 믿음 따위는 개인이 쉽게 꾸며낼 수 있으며, 계량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랍니다.
믿음과 감정 대신 논리와 이성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 선택이론을 통한 풀이가 전쟁과 폭력 연구에 더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한동안 산을 올라 무장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정치적이나 감정적인 동기로 인해 무장항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무장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 (Collier and Hoeffler 2004)이지 않으면, 죄 없는 민간인들이 총 맞아 죽는 시대엔 무장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 (Kalyvas and Kocher 2007)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리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수기를 통해 '합리'로 풀어낼 수 없는 큰 힘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힘이 현실에 큰 파동을 일으켰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보단 일제에 어느 정도 순응하며 인생을 살았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던 시절, 많은 사람들인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제일 합리적으로 보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압록, 두만강을 건너거나 지하로 숨어 들어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사람들은 그런 합리성을 전혀 무시한 채 전혀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봐야겠지요.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 중 한지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38년 조선의용대 창립멤버로, 2차 대전 당시 임팔-버마 전선에 파견됐던 대한광복군 인면 전구 공작대원 중 하나입니다. 그는 1944년 8월, 버마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전선 선전활동을 수행한 광복군 대원들의 활약을 전하며,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독립신문>을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 한국 민족의 나아갈 길은 다만 죽음으로써 삶을 찾는 것이다. 우리들은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과 대가도 계산해서는 안된다. 우리 동지들은 모두 나와 같은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민족의 영예를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그때 그 시절, 현실적으로 이길 희망이 없어도 옳은 일에 목숨 바칠 기회를 기꺼이 받아 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옳은 일을 위해 포연 속으로 뛰어들어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겨레의 이름으로 합리성으로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이 사람들은 역사, 그리고 후세에 깊은 인상을 남기곤 연기처럼 흩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