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과 내전 1: 내전의 성격, 그리고 원인
지금껏 만두박사의 정치학 산책은 국가, 힘, 아이덴티티와 폭력 등 정치학 이론의 핵심이 되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정치학의 핵심을 이루는 여러 통의 수박의 겉을 살짝 핥아 봤으니 이제 각본대로 ㅎㅅㅎ; 제 전공 속으로 한걸음 더 파고 들어가고자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미얀마에서 시작합니다.
"အရေးကြီးပြီညီနောင်အပေါင်းတို့
형제 동지들이여, 몹시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သွေးစည်းကာ ညီစေညီကြစို့
우리 오직 한마음으로 함께, 함께 나아가자
ငါတို့ရဲ့ သမိုင်းတစ်ခေတ်ကို ငါတို့သွေးနဲ့ရေးခဲ့သည်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피로 쓰였다
သွေးသစ္စာလည်းပြုခဲ့ပြီ
우리는 피의 맹세를 맺었다"
2021년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를 평화시위를 통해 맞대응하던 미얀마 시민들은, 군부의 유혈 진압, 그리고 국제사회로부터의 외면으로 인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는 군부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따라 수많은 청년들이 소수민족 무장단체 구역으로 숨어들어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에 나서거나, 각자 마을의 소위 국민방위대 (People's Defence Force; PDF)라는 조직을 결성, 가입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선 '투미 총'이라 부르는 전통 화승총이나 사냥총 따위로 무장한 그들은 매복 기습과 같은 게릴라전은 물론, 경찰서와 군 초소를 직접 공격하는 대범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온갖 중화기로 무장한 군부 병력에 비해, 마을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국민방위대는 훈련받지도 못했고, 무기도 변변찮습니다. 미얀마 각지의 국민방위대가 생각보다 눈부신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몹시 단단한 계란이라 해야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단단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오늘도 총을 들고 일어납니다. 피의 맹세를 맺었다는 그들은 박물관에서나 보일법한 구시대의 무기로 위대한 저항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2021년 6월, 미얀마 밖 많은 언론인들은 독립이래 계속된 내전을 치르고 있는 미얀마가 또 다른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내전'이란 무엇일까요? 칼리바스(Kalyvas 2006)는 내전을 "동일한 정부 아래 통치받았던 사람들 간의 무력 투쟁"이라 정의합니다만, 사실 정치학에서 내전을 정의하는 방법이 워낙 중구난방이라 쉽사리 '내전'이란 이런 것이다-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답니다. 내전을 정의하는 기준을 두고 큰 논란이 있거든요. 가장 많이 거론되는 웁살라 대학의 웁살라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 (UCDP)과 미시간 대학의 Correlates of War (COW)를 들어 비교하겠습니다.
COW는 내전을 아래와 같이 정의합니다: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국가 또는 지역(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 - 예를 들어 대만, 또는 소말릴란드) 안에서 일어나며,
1년에 최소 1000명 이상의 전투 사망자가 발생해야 할 것.
대충 그럴싸합니다만, 사실 실제 일어나는 내전과는 괴리가 있습니다. 먼저, 내전은 하나의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몇 개의 나라가 동시에 무너져 국경을 초월한 군벌이 난립하거나, 국제정치적인 이유로 하나의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비정부 무장단체 (이른바, 반군)가 존재합니다. 제일 가까운 예로 이라크에서 발생해 시리아까지 영토와 전역을 확대한 ISIS가 극히 최근까지 맹위를 떨쳤지요. ISIS는 특히 중동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활동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년에 천명 이상의 전투 사망자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도 실제로 일어나는 내전과는 괴리가 없잖아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같이 수만 명이 순식간에 죽고 다치는 전면적인 내전도 있지만, 사실 그런 내전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 1년에 수십 명이 죽을까 말까 하는 저강도 내전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얀마의 샨족 무장단체인 RCSS (Restoration Council of Shan State; '샨주 회복 위원회' 또는 이른바 '샨 남군')는 2017-20년 사이 미얀마 정부군과 70차례 충돌했고, 카렌족 무장단체인 KNLA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카렌 민족 해방군)은 동 시기 23차례 충돌했습니다. 이 두 단체 모두 미얀마 정부군과 충돌하며 연평균 천명은커녕, 백명의 사망자도 나오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충돌로 인해 분쟁지역의 민간인들이 겪는 폭력, 난민들의 대규모 피난과 경제적 손실은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또, 인도나 한국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에서의 내전은 연평균 천명 이상의 전투 사망자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인구수가 백만 명이 넘지 않는 피지와 같은 국가는 연평균 천명 이상의 전투 사망자가 발생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망자 수는 그 지역 인구 밀도에 따라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 점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죠.
반면, 위 상술한 COW의 비판점을 어느 정도 수용한 UCDP는 내전을 아래와 같이 정의합니다:
1년에 최소 25명 이상의 전투 사망자가 발생하고,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국가 또는 지역 안에서 일어나며,
교전 당사자 중 하나는 국가 정부여야 할 것.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정의입니다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1년에 최소 25명의 전투 사망자 발생으로 기준을 낮춰 저강도 분쟁을 내전의 범위로 볼 수 있게끔 했습니다만, 하나의 국가, 또는 지역 안에서만 일어나야 한다는 기준 위 COW와 동일하게 문제가 큽니다.
UCDP의 내전 정의에서 제일 큰 문제가 되는 건 '교전 당사자 중 하나가 국가 정부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전 연구는 정부와 정부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란군 간의 국가통제를 위한 다툼으로 이해했습니다만, 많은 내전은 아예 국가 정부가 무너진 채 각지 군벌들이 세력을 갖추고 다투는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우리네와 가까운 후한말의 군웅할거를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후한 말의 혼란상은 정부의 통제가 무너져 각지의 군벌들이 서로 다툰 형상이었지, 한나라 조정의 관군이 교전 당사자로서 군벌들과 창칼을 맞대진 않았지요.
하지만 그 정의야 어쨌건 내전은 몹시 참혹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 끊이지 않습니다만, 내전이 국가 간 전쟁보다 특히 더 참혹하다는 것은 정치학계 내에서도 큰 이견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 인으로서 아일랜드 내전을 오랫동안 연구한 정치학자인 키산 (Kissane 2016)은 내전의 참혹성을 두고 "이웃이 적이 되고, 가족이 분열되고, 하나의 국가공동체가 원수들의 공동체로 변하게 된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럼 청년들은 왜 총을 들게 될까요? 19세기부터 이어진 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 혁명의 바람과, 사회주의 노선의 무장투쟁을 낭만적으로 여겼던 과거 정치학자들은 반군의 결성과 내전의 발생을 어떤 한 고충이나 참을 수 없는 불의를 해소하기 위한 저항이라 여겼습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들이 삶을 바꾸기 위해, 또는 정치적인 이상 실현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죠. 2차 대전 이후 모택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체 게바라, 반식민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호찌민 등의 투사들의 출현도 그런 생각이 자리 잡는데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60년대 중반 배링턴 무어(Moore Jr. 1966)의 저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이 대표적입니다. 근대화 혁명의 방향성과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던 무어는 저서 내내 농민들에게 온정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 혁명의 원인과 그 방향성을 고찰하며 근본적으로 농민들의 과도한 수탈을 중국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자유주의에 기반한 과두정치를 시도할 부르주아 계급이 전무한 와중, 지배계급이 피지배층을 과다하게 쥐어짜다 보니 터질게 터졌다는 논리인 것이죠.
반군을 웬만하면 혁명가, 자유투사로 보는 시각은 그 이후 크고 작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폽킨(Popkin 1979)의 농촌사회 연구가 그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폽킨은 농촌 내 갈등과 분쟁을 연구하며 농민들은 결코 '법 없이도 살' 순박하거나 권위와 문화적 굴레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철저히 이득 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전통과 관습에 묶여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농촌도 이득중심 합리적 결정을 내린다는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1990년대에 들어 반란군 결성과 내전 발발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큰 원인이라는 주장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수탈과 불공평한 사회구조가 존재하지만, 그게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다는 것을 이유로 '내전'과 '사회적 불평등/수탈'의 관계를 부정했습니다.
그 대신 콜리어와 호플러 (Collier and Hoeffler 2003)와 같은 학자들은 반란의 경제적 이득에 집중했습니다. 콜리어와 호플러는 (지금은 다소 나사가 빠졌다 평가받지만, 후학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준) 통계학적 분석으로 내전은 그 사회가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 놓였을 때 제일 일어날 확률이 높다 주장했습니다. 실업률이 높은 곳, 또는 약탈할 수 있는 값비싼 자원이 존재하는 나라 등에서 내전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은 것을 주장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총을 들고 반란에 참여하는 게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니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것이죠. 이른바 "고충 이론 (Grievance theory)"에 대비되는 "탐욕 이론(Greed theory)"입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칼도(Kaldor 1999)는 냉전 이전, 이후의 내전을 살피며 현대의 내전은 몹시 다르고 격한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90년대 이전엔 독립, 또는 혁명을 목표로 활동하는 무장단체들이 내전을 벌였으나, 90년대 이후로는 마약 유통, 자원 약탈 등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위해 활동하는 반군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더욱 잔혹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내전의 원인은 켜켜이 쌓은 압제와 사회적 불평등일까?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경제학의 영향을 받은 탐욕 이론은 초장부터 큰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콜리어와 호플러의 통계조사의 정확성에 대한 맹렬한 비판은 둘째 치고, 고작 몇 푼 벌기 위해 생계를 팽개치고 위험과 굶주림이 도사린 무장반란에 뛰어드는 건 딱히 합리적인 결정이 아닌 것처럼 보이거든요. 예를 들어 미얀마의 까친 독립군에 징집된 병사들은 월급은커녕, 징집병의 가정이 한 달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료품 약간을 지급받습니다. 또, 내전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은 반란을 일으킨 군벌 엘리트들에게 집중되지, 저와 독자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전투 중에 밟혀 죽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예를 들어 엘 살바도르 내전 전투원들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우드(Wood 2003)는 무장반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사회혼란 도중 한탕 크게 해 먹거나, 탐욕을 위해 반란에 참가한 게 아니라, 공동체 공동의 이익, 불평등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개인이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적인 자아실현이 주된 참가 동기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시더만, 글렌딧치와 부하우그 (Cederman, Glenditsch, and Buhaug 2013)는 통계분석을 통해 사회 전체를 통틀어 생겨난 수직적 불평등이 아닌, 집단 간의 수평적인 불평등이 내전을 일으키는 주원인이라 주장했습니다. 불평등이 개인 차원을 뛰어넘어 민족 간, 또는 지역 간의 불평등으로 확산되면 그것이 내전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과거에 소개했던 '마웅'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지금은 외국에 공학을 공부하러 유학길에 떠난 그는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동족인 아라칸 민족이 받는 압제에 대해 크게 분노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짐작컨대 마웅과 비슷한 경제적 여유를 가졌을) 주변 많은 친구들이 아라칸 군에 입대했다고 밝혔습니다.
부족함 없이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친구들이 왜 무기를 들었을까요?
반면 샨주 씨포에서 만난 샨족 청년은 민족의 이름을 팔아 마약 유통으로 잇속을 챙긴 무장단체들을 (비록 글로 싣지는 못했지만) 비난하며 내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윤의 실체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내전의 원인은 탐욕일까요, 고충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