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 하나가 무거워보이는 비닐봉지를 들고는 탁상 위에 쿵- 하고 놓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황록색의 총알이 한가득 들어있습니다. "우리 사냥총에 쓸려고 가져왔어." 가져온 병사가 얘기해줍니다. "땃마도 병사들한테서 노획한 거야." 그들 눈으론 도시 샌님으로 보였을 제가 신경이 쓰였는지 굳이 어떻게 노획됐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비닐봉지를 가운데 두고 병사들과 장교가 모여 총알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정리합니다. 저도 몇 개 집어 들어 만져봅니다. 머리에 털나고 손에 총알을 처음으로 쥐어 본 순간입니다. 탄피 아래엔 '၇၆၂' 라 새겨져 있습니다. 미얀마 7.62mm 탄환입니다. BA-63 소총에 사용되는 총알입니다.
총알을 손바닥 위에 얹으니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만질 때의 촉감은 몹시 텁텁했습니다. 손끝이 탄두로 가자 무척 뾰족합니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연락장교 B도 어딘가에서 나타나 제 어깨에 손을 턱 얹습니다. 제게 '그래 짜이 쌈 이거 맞으면 사람 하나 작살나는 거야'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대충 총알을 훑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총알이 죄 없는 민간인들 쏴 죽이는 총알이라는 거죠?"
총알을 만지며 제가 물었습니다. 아마 제가 왜 땃마도 총알 앞에서 그렇게 마음이 불편해졌는지 원인을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집총 하지 않겠다며 총에 손대는 걸 사양하던 제게 남군 병사들이 자동소총을 쥐어보라고 장난스레 불쑥불쑥 내밀어도 거부감이 없었거든요.
그 말을 듣곤 A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땃마도 애들을 더 많이 쏴 잡아야겠지?"
A가 그렇게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항이 시작된 1958년 이래 지금까지 미얀마 군부, 땃마도는 샨주에서 마치 재앙과도 같은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저항세력과 주민들 간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명목 하에 마을을 통째로 불 지르고, 군입대 연령이 된 청년들을 잡아다 강제노역을 시키지 않으면, 그냥 쏴 죽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미얀마 전국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샨주와 같은 분쟁지역에선 너무도 오래된 일상입니다.
"샨족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 아픈 이야기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어. 우리 모두 부모형제, 누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거든. 도저히 잊혀지지 않고 여기 우리 가슴속에 항상, 항상 남아있어. 모든 걸 잊고 용서하는 게 쉽지 않아." 언젠가 A가 제게 해 준 말입니다. 저와 있을 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도 형제와 할아버지를 땃마도의 폭력에 잃었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업무상 버마인들과 잦은 소통을 하는 그는 그들과 항상 영어로만 대화했습니다. 그는 제게 "나는 버마인들을 증오해서, 버마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얘기했었습니다.
"이걸 네가 가져갔으면 좋겠어." 한 장교는 사진 묶음을 꺼내 제게 건네줬습니다. 열댓 살도 안됐을 아이의 모습과 불타는 오두막, 그리고 시꺼멓게 변한 시신이 찍혀 있습니다. "버마 병사들이 이 아이를 겁탈하고 이렇게 죽였어. 어디 가서 인권 이야기를 할 일이 생기면 꼭 이걸 보여줘. 사람들에게 이 아이의 이야기를 꼭 들려줘."
사진을 살펴보곤 저도 할 말을 잃어 정신없이 사진을 챙겼습니다. 황망히 사진을 챙겨 받아 아이의 이름도 제대로 받질 못했습니다. 이 친구의 독사진엔 카메라를 든 사람의 애정 어린 시선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시립니다.
누가 이 사진들을 찍었을까요?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전쟁을 물려주며 버틴지도 이제 60년이 훌쩍 넘은 지금, RCSS를 비롯한 샨족 무장단체들은 이제 더 이상 독립이란 단어를 잘 꺼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요구사항도 독립에서 한발 양보해 '샨주의 자결권'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독립보다는 연방 민주주의 미얀마에서 차별 없는 동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 주던, 그게 아니라면 팡롱 조약에 의거한 자치권을 온전히 되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언제 올까요? 2012년과 2015년에 걸쳐 휴전협정을 맺고, 최근엔 여론의 질타를 무릅쓰고 민 아웅 흘라잉이 제안한 평화 협상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만, RCSS 장교들은 그 일련의 행동이 실제로 유의미한 평화를 가져오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버마족은 버마족일 뿐이야." 한 장교가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방콕에서 태국 기업인들을 만나는데, 어떤 한 버마족 사업가가 와서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왜 샨주에 투자를 하려고 합니까? 샨족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고 무식한데요. 미얀마에 대한 투자는 우리 '미얀마인'과 진행해야 합니다' 라 하더라고. 내가 거기 뻔히 앉아있는데."
그들은 굳이 땃마도만 문제가 아니라, 버마족 사람들이 지금껏 내보인 버마족 중심주의가 더 큰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땃마도의 폭력성은 그 빙산의 아주 흉측한 일각일 뿐이라고요. 다른 한 장교가 말을 거들었습니다:
"예전에 한창 연방 평화회의를 할 때 소수민족 무장단체 지도자들이 기조연설을 한 적이 있었어요. 혹시 짜이 쌈도 봤어요? 그때 버마인들 여론이 참 끔찍했어요. '미얀마 사람'이 어떻게 '미얀마어'를 저리 못 하느냐, 억양을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하는 식의 의견이 많았습니다. 걔들은 우리에게 버마어는 외국어와 같다는 걸 몰라요.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무신경한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지금 일어나는 미얀마 민간정부 NUG와 땃마도 간의 전쟁도 조금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샨주 남부군 장교들은 NUG 휘하 인민 방위군의 작전 현황과 무장상태를 매일같이 확인하면서도, 과연 NUG가 과거 미얀마 정권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지에 대해선 큰 자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과거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과 지금은 많이 달라 보인다, 현 민간정부 대통령이 까친족 아니냐, 등 NUG에 호의적인 얘기를 해도 요지부동인 장교들이 많았습니다. "과연 그렇게 된다고 우리 혁명이 끝날까?" 한 장교가 제게 되물었습니다. "우리가 싸운 지 이제 벌써 60년이 훌쩍 넘었는걸."
사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샨주는 미얀마가 민주주의 정권일 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중앙정부를 상대로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미얀마의 버마족 중심주의가 해체되지 않으면 NUG가 이기나, 땃마도가 이기나 도찐개찐이라 생각하는 그들의 심정은 비록 안타까울지언정 지극히 타당합니다.
대신 그들은 미래를 봅니다. 로이따이렝의 사람들은 정치던, 보건이던, 교육이던 "우리가 모든 준비를 마친 시간이 오면-"류의 표현을 굉장히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의 조그만 양보, 또는 완전히 보장받지 못한 불완전한 권리보다는 먼 훗날 후손들이 꾸려나갈 샨주의 미래를 위해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한 여단장이 제게 해 준 말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짜이 쌈, 내가 만약 토론토로 여행을 간다고 생각해봅시다. 토론토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마치 우리 혁명에 여러 가지 노선이 있는 것처럼요. 토론토로 열심히 가다가 중간에 런던에 멈춰 설 수도 있겠죠? 거기에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면서. 그러다 나는 나이가 너무 들어 토론토를 못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늙어 토론토를 보지 못하고 죽더라도, 내 아이들은 항상 가슴속에 언젠가 토론토에 도착하는 꿈을 가질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은 토론토에 도착할 겁니다.
우리에게 독립은 그것과 같아요. 만약 내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더라도, 우리 아이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계속 품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던, 그들은 반드시 독립한 조국을 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