샨주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연줄
"있잖아 만두박사, 거기엔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연줄이 아주 끝없이 꼬여 있어"
샨주 정세에 정통한 인사와 인터뷰를 하던 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대로 샨주의 정치와 무장단체들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하긴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한때 전우였던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 총질을 하기도 하고, 맹렬하게 싸우던 서넛 세력이 갑자기 동맹을 맺어 한 단체로 합체하곤 다시 또 다른 단체들로 흩어지기도 합니다. 최근엔 미얀마 군부로부터 마약밀매범으로 찍힌 샨주 군벌 장례식에 미얀마 군부 대표단이 조문을 온 아주 황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중 아마 쿤사, 또는 장치푸 (1934-2007) 처럼 서로 엇갈린 평가가 켜켜이 쌓인 인물이 또 없을 겁니다.
샨주의 군벌로 한때 동남아 마약시장을 석권했던 그는 1996년 1월 모든 무기를 버리고 미얀마군에 항복했습니다. 그가 항복을 한 그 순간, 미얀마 군부는 그를 "마약왕"에서 "국가원로"로 치켜세워주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샨주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샨 민족해방의 지도자"에서 순식간에 "마약에 영혼을 판 배신자"가 됐습니다.
마약왕이자 민족해방 투사. 쿤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쿤사, 또는 장치푸는 중국인 아버지와 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샨-중국인 혼혈인 것이죠. 어릴 때 부모님이 요절한 그는 로이마우의 촌장이었던 할아버지 손에 자랐습니다.
그의 첫 무력투쟁은 1950년대에 샨주를 침략한 국민당군을 상대로 일어났습니다. 로이마우에서 행패를 부리던 국민당 병사들을 보다 못해 마을 청년들을 모아 국민당군을 습격해 무장해제를 시킨 것이죠. 그 이후 쿤사는 사업을 벌이며 (나중에 샨 동부 군으로 샨 독립투쟁에 합류했고 훗날 버마 공산당에 합류하는) 꼬캉 민병대 아래에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1960년대부터는 버마군에 협력해 본인이 이끌던 로이마우 민병대를 향토방위 민병대, 현지어로는 '까퀘예(ကာကွယ်ရေး)'로 불리는 공식 조직으로 탈바꿈합니다. 당시 버마군은 샨주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 샨족 반군, 국민당군, 그리고 샨주 북부에서 큰 세력을 갖춘 버마 공산당을 상대로 맞서 싸우기 위해 공식 민병대를 조직했었습니다.
버마군은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그들이 무장과 탄약을 자급자족하게 했고, 그 대신 까퀘예들이 재원 조달을 위해 벌이는 모든 사업행위를 허락했습니다. 버마군이 승인한 사업행위엔 아편 유통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동남아 황금 삼각지대를 석권한 마약왕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한때 샨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샨군(SSA-Shan State Army)* 합류 모의로 인해 국가전복 혐의로 감옥에 수감됐던 쿤사는 74년 석방돼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재중에도 기어이 SSA와 연합했던 그의 군대를 되찾아 샨주 남부를 휩쓸었습니다.
*샨족 해방운동 초기에 큰 역할을 한 단체로, 1964년 샨족 무장독립단체들이 합쳐 결성됐습니다.
70-80년대에 이르러 공산진영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하는 샨주북부군과,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하는 샨주남부군으로 나뉘어졌고, 그때의 갈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샨-태국 국경지대를 석권한 쿤사는 1985년 샨 분리주의 단체들인 샨 연합 혁명군(SURA - Shan United Revolution Army), 샨주남부군 등 샨주 남부의 세력을 규합한 믕따이군(Mong Tai Army)를 창설해 전 세계 아편 시장의 70%를 독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약과의 전쟁을 펼치던 미국은 그를 국제 마약밀매의 핵심인물로 짚고 그의 제거에 온갖 힘을 기울였습니다.
쿤사는 태국, 버마, 라오스, 심지어 옛 적이었던 국민당군까지 가리지 않고 야합과 대립을 반복하며 그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의 뒤를 봐주는 태국 장성들에게 거마비와 정치자금을 대 가며 태국 안에서 믕따이군과 밀매업자들이 활용할 안전지대를 조성했고, 믕따이군은 국경이 무색할 지경으로 샨주와 태국을 모두 포함한 광활한 국경지대에 세력을 뻗쳤습니다.
지금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치앙마이도 쿤사 시절의 향이 진하게 남아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황금 삼각지대에서 발생한 마약 밀매 대금이 세탁됐고, 지금도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사람들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한때 동남아의 공산화를 막는데 집중했던 미국이 굳이 치앙마이에 영사관을 연 이유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쿤사는 북동부 사령부에 취임한 버마군 장성들에게도 마약 매매 대금을 쥐여주고, 장성들이 뇌물로 받은 온갖 장물을 처분해주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믕따이군과 버마군 사이 불필요한 무력충돌을 줄이고 그의 세력권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쿤사가 얼마나 기름칠을 잘했었는지, 당시 버마군은 그냥 믕따이군과의 전쟁을 조작해버리기까지 했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쿤사를 상대로 액션(?)을 취할 필요성은 느꼈지만, 차마 쿤사와 싸우지는 못하겠으니 그냥 대규모 군사작전을 통째로 지어내버린 것이죠. 포탄이 꽂히고, 헬리콥터가 시끄럽게 날아다녔는데 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샨족 민족주의자들이 이런 쿤사의 행태에 진절머리를 냈습니다. 민족해방을 위해 무장투쟁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의 눈에는 싸움을 피하고 돈 버는데 집중하는 듯한 그의 모습이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쿤사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시절에도 샨족 출신의 믕따이군 병사들이 "핵심 직책은 중국계 샨족이 다 가져가고 남은 샨족은 총알받이나 한다"라고 푸념했었고, 90년대엔 믕따이군 내부 간행 잡지에서 쿤사의 혈통, 그리고 '샨족 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날선 토론이 공개적으로 오갔습니다. 조직력이 생명인 반군단체에서 지도자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큰 파열음이 난 것입니다. 심지어 믕따이군 말기엔 쿤사가 샨 민족주의가 아닌 마약 산업에만 열을 올린다며 믕따이군에서 큰 규모의 샨족 병력이 샨주 민족군(Shan State Nationalities Army)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돼 나가기도 했습니다.
샨주남부군을 이끄는 RCSS 주석 욧석 또한 몇 년 전 정문태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직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애초 나는 장사꾼인 쿤사를 안 믿었고 인정 안 했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SURA를 통해 군문에 들어선 그는 96년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한 옛 동지들과 샨주남부군을 다시 재건해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 그에게 쿤사는 그저 마약에 눈이 먼 배신자일 뿐이었겠죠.
반면 SSA의 창설 멤버이자 지도자였던 짜오 장 야웅훼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 쿤사를 진정으로 샨 민족을 위했던 독립지사로 평가합니다. 그는 쿤사가 60년대 초반부터 샨 민족 무장투쟁 합류를 타진했으나 단체 간의 오해로 버마군에 붙어버렸고, 69년 쿤사가 버마군에게 체포된 것 또한 다른 문제가 아니라 SSA에 합류를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격동하는 샨주 정세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인 마약왕 쿤사 안에는 샨 민족해방을 위했던 투사가 있었다고 본 것이죠.
실제로 쿤사는 생전 샨 민족의 독립투쟁과 문화 보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가 장악한 영토 곳곳에 샨 문자 교과서를 보급하고 샨족 불교사원을 설립하는 등 샨족 민족주의에 굉장히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위 언급한 믕따이군 내부 잡지 또한 아주 강경한 샨 민족 해방주의 단체였던 SURA가 간행하던 샨 언어 잡지를 믕따이군이 이어받아 계속 간행한 것입니다. 93년엔 다른 무장단체들이 연방주의를 통한 버마족과의 평화로운 공존으로 의견을 모으는 와중에 믕따이군 혼자 급발진(...)해 샨 민족의 독립국 설립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믕따이군의 전성기엔 공산진영과 연대한 샨 북부군이 아닌, 믕따이군 아래로 샨족 지식인들과 유명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샨족 엘리트들은 민족주의에 시큰둥했던 버마 공산당과 손잡은 샨 북부군보다는 믕따이군을 샨 족을 대변하는 단체로 여긴 거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쿤사가 한때 쥐었던 이 정통성은 쿤사와의 단절을 선언한 샨주남부군이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마약밀매에 대한 혐의도 정상참작을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종종 들립니다. 사실 쿤사를 포함한 샨주 무장단체들이 직접 아편을 생산한 건 아닙니다. 샨주에서 나오는 아편 수출(?)과 헤로인 가공업(?)의 절대 대다수는 무장단체들이 아닌, 치외법권 지대가 필요했던 조직폭력배들과, 아편을 재배해 생계를 이어나갈 농민들의 협력으로 이뤄졌습니다.
농민들에게 아편은 아주 편리한 작물입니다. 병해충을 타지 않는 아편은 경작 내내 손이 많이 들어가는 다른 농작물과는 달리 햇볕만 좋으면 아주 잘 자랍니다. 행여나 마을 근처에 전투가 벌어져 근처에 피난을 갔다 오면 쌀농사는 망치더라도 아편농사는 망치는 법이 덜합니다. 수확 후 부피와 무게가 큰 다른 작물과는 달리 진액을 모아놓은 것을 자루에 얼른 넣고 냅다 뛰어도 됩니다. 그런 아편은 진통제로도 쓰이고, 사람을 뿅 가게 만드는데도(...) 쓰여서 지금도 아주 수요가 높은 작물입니다.
그런 아편을 중간상인들이 저렴한 값에 도매해서 태국이며, 라오스로 날라 권력을 등에 업은 조직폭력배들이 헤로인으로 가공했습니다. 보통 각 정부가 묵인한 치외법권 지역, 또는 무장단체들로부터 임차한 토지에 공장을 세워서 작업을 합니다. 이렇게 가공된 헤로인은 제3 국으로 유통돼 당시 베트남 전쟁으로 마약 수요가 폭등한 미군 병사들에게 팔렸습니다. 아편을 키운 농민의 손에서 한국, 일본, 또는 미국의 마약 사용자의 손으로 들어가기까지 아편의 값은 수백, 수천 배가 뜁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수익의 제일 큰 파이는 조직폭력단에게 흘러갑니다.
이 유통구조에서 샨주 무장단체들은 주로 당나귀 수백 마리 위에 짐을 실은 마약 운송 행렬을 지정된 목적지까지 경호해주고, 그 대가로 경호 대금을 받고 샨주로 돌아오는 당나귀에 각종 기호품과 공산품을 싣어다 팔 권리를 챙겼습니다. 그리고 관할구역을 통과하는 마약에 통행세를 매겼습니다.
지금도 많은 미얀마 반군들이 "우리는 마약을 밀수한 적이 없다"며 국제사회에 마약 밀매상으로 찍힌 것을 억울해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상술한 사실을 엄밀히 놓고 말하자면 맞는 말인 셈입니다. 마약 유통에 통행세를 매기고 상인들을 경호할지언정 마약을 실제로 생산한 단체는,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이제는 마약의 폐해를 자각한 많은 무장단체들이 아예 마약 근절을 위해 양귀비 밭을 갈아엎고 마약 운송 행렬을 단속하기도 합니다.
* 예외로 2009년에 펑짜신의 미얀마 민족민주 동맹군(MNDAA)이 메스암페타민을 직접 생산한 혐의가 있었습니다. 이 마저도 미얀마 군부가 MNDAA를 시범 케이스로 조져 통제에서 벗어난 무장단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덮어 씌운 혐의라는 얘기가 종종 들립니다만, 진실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지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쿤사도 자기 관할지역 내에서 (농민들을 위해 아편 재배는 눈감아 줄지언정) 마약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쿤사는 수차례 서방에 "내가 유통하는 아편을 모두 수거해 불 질러 버리고 샨주의 아편 재배를 뿌리 뽑을 테니 돈을 주던, 무기를 주던 우리의 무장투쟁을 지원해달라"는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물론 범죄자와 거래하지 않는다는 미국이 단칼에 거절한지라 그저 제안으로 끝났습니다.
비슷하게 쿤사가 수감됐던 시절 샨주 마약유통로를 장악해 쿤사와 같이 마약왕이라는 타이틀을 쟁취한 샨주의 꼬캉족 군벌 로싱한 또한 70년대에 버마군과 협력관계를 단절하고 SSA와 연합하며 미국 정부에 쿤사와 동일한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미국 대표단과 접선을 위해 태국으로 내려간 로싱한은 바로 그 자리에서 체포돼 버마 정부에 넘겨져 (마약밀매가 아닌) 국가전복 혐의로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미심쩍게 석방된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무장투쟁에 가담하지 못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해 힘껏 지원해주리라 믿었던 서방진영에게 도저히 수습하지 못할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샨주엔 그런 그들에 대해 온정적인 시각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조용히 은퇴한 쿤사와는 달리 로싱한은 80년대 후반 샨주에서 휴전협상이 일어질 당시 버마 군부와 무장단체들을 연결하는 중개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샨 사람들이 로싱한과 같은 사람들을 신뢰했고, 그가 이빨이 다 빠진 와중에도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는 거겠죠.
오늘도 샨주 산자락엔 양귀비 꽃이 자랍니다. 쿤사는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빈자리는 한때 쿤사와 혈전을 벌였던 와주연합군(UWSA - United Wa State Army), 그리고 미얀마 군부의 비호를 받는 국경수비대와 민병대들이 차지했습니다. 그때처럼 지금도 미얀마는 국제 마약 생산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마약왕이자 민족해방 투사. 쿤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몽타이군에서 언론 대변인을 맡았고, 현재 샨족 언론인 양성에 매진하며 미얀마 평화 협상단의 고문역을 맡고 있는 큰사이 자이얀은 "[내전이 다 끝난] 훗날 역사가 그를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샨주에 총성이 멎지 않은 지금, 어쩌면 쿤사의 역사적 평가는 현재 진행형 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