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잠결에 옆에서 경문 외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저를 포함한 내무실 인원 전원이 화들짝 놀라 깨 이부자리 정리를 하고 물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RCSS 중앙위원회 회의 때문에 잠깐 방문한 타 지역 여단장님이 제일 먼저 일어나셔서 새벽 예불을 드리신 겁니다.
여단장님 깨셨는데 저도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얼른 이불을 개고 뭐라도 일손을 돕습니다.
D 중령은 RCSS의 창립 멤버입니다. 1994년 믕따이군을 통해 다시 군문에 들어선 이래, 항상 욧석 장군 아래에 있었습니다. 옛 조직의 끝과 새 조직의 시작을 함께 본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소년병으로 처음 총을 쥔 소년은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가, 승복을 벗고 다시 군인으로 변했습니다.
작은 키의 어쩌면 왜소하다 싶은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D의 손은 곰처럼 무겁고 두텁습니다. 그리고 항상 날카롭게 번쩍이는 인광이 D가 평생을 싸워 온 전사였음을 온몸으로 증명합니다. 그는 RCSS가 치른 주요 전투에 대부분 참전했습니다. 제가 로이따이렝에 지내는 내내 다른 장교들은 그를 '람보,' 또는 '아메리칸 스나이퍼' 등 좀 살벌한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D는 믕따이군의 항복을 거부하고 욧석과 함께 정글로 들어간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땃마도 (미얀마 군부) 병력이 진지를 몇겹으로 포위하고, 땃마도 정보장교가 주둔지에 들어와 욧석이 지내는 공관에 짐을 풀고 같이 잠을 자려던 때, 욧석은 더 싸우고자 하는 자기 병력을 데리고 안개 낀 새벽에 아무런 피해 없이 진지를 빠져나왔습니다. 마치 건국신화인 것처럼 화자가 숨죽여 전해주는 RCSS의 시작입니다만, D는 무덤덤하게 얘기합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냐 물으니 다 사실이랍니다. 자기가 거기 있었다고요.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어떤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나요?"
어느 아침, 같이 마실 커피를 타 드리며 제가 물었습니다. 커피를 쥐고 질문을 통역한 장교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떠오릅니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상사가 짐 싸고 나간다는데 뭐 별 수 있나. 그냥 따라가야지."
D에게 믕따이군에 입대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답변이 간결할까 생각했는데,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원래 나는 SURA (샨 연합 혁명군) 소년병이었어. 그런데 이제 버마 공산당이 샨주 남부로 남하하면서 전투가 격렬해지니까 지도부가 나를 빼서 수도원으로 보내버렸어. 어린아이가 감내하기엔 전쟁이 너무 격렬하다고, 행여나 꼬마애가 다칠까 봐 그랬다데. 그다음부터 한동안 중노릇하며 지냈지."
D가 잠깐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빠다 코코넛과 흡사했던 비스킷을 집어 우물거립니다. D가 젊을 시절부터 그와 오랫동안 동거 동락한 장교 A가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더니 D가 수도승으로 오래 지낸 탓에 단 걸 너무 좋아한다며 쿡쿡 찔러댑니다. 서로 한참 웃더니 D가 다시 이야기를 잇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승복을 벗고 믕따이군에 입대했어. 그때 서른다섯 명인가 나랑 같이 승복을 벗고 입대했을 거야. 기초 군사훈련을 수석으로 졸업해 분대장이 됐다. 내가 기수 대표로 짜오 쿤 사 앞에서 경례를 하고 그분이 직접 내 계급장을 달아주셨어. 그때부터 지휘관 노릇을 한 게 올해로 26년이 됐다."
"그러기 전에 감옥에 먼저 갔어 이 사람." 뭔가 답이 시원찮다는 듯 A가 끼어들어 영어로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그날은 스무스한 인터뷰를 위해 통역이 붙었지만, 그래도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D가 '아이고 이 사람 굳이 그런 얘기 꺼내서 뭐 하나' 하는 표정으로 A를 봅니다. "승려생활을 할 때 땃마도 검문소에서 몸수색을 받았는데, 가지고 있던 공책에 '프리덤 웨이'* 로고가 그려져 있었대. 그 자리에서 바로 뚜드려 맞고 2년인가 징역살이를 했을 거야. 풀려나자마자 그 길로 바로 입대한 거야."
"운이 좋았지, 그래도." A가 덧붙였습니다. "같이 있던 다른 양반은 그 자리에서 총 맞아 죽었으니."
* '프리덤 웨이(Freedom's Way)'는 오래전부터 샨 혁명가요를 작곡하고 공연했던, 샨족 사이에서 아주 인기 있는 밴드입니다. 전에는 노래를 듣는 거 자체로 이적죄가 적용됐는데, RCSS와 미얀마 군부 간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금지령이 풀렸습니다. 휴전 직후 샨 전주 투어를 열광적인 환영 속에 치루기도 했습니다.
D가 한번 못마땅하게 쯧- 혀를 차더니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하여튼, 그래서 훈련소에서 나온 뒤 바로 믕쫏 (Mong Kyawt) 싸움에 참전했다. 아주 큰 싸움이었어. 우리 병력만 해도 2,000명이 넘었을 거야. 왜 평화협상 담당하는 봉커 장군 아나? 내 동기야. 지대공 미사일 팀 지휘관이었어. 처음엔 우리가 크게 이기다가, 나중엔 아주 크게 졌어."
"어쩌다 그렇게 됐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믕쫏 전투는 믕따이군이 치른 마지막 대규모 공세입니다. 그곳에서 믕따이군은 도저히 회복하지 못할 대패를 겪고 분열을 거듭하다 1996년 1월 미얀마 군부에게 항복했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만한 탄약도 없고, 돈도 없어. 우린 정부군이 아니니까. 땃마도 공군이 한 달 내내 우리 진지를 폭격했었어. 쉴 새도 없이. 나랑 같이 승복을 벗고 입대한 친구들 믕쫏에서 많이들 죽었어."
잠깐 있다가 D에게 휴전에 대해 물었습니다: "2012년에 맺은 휴전협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RCSS는 2012년 미얀마 군부와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2015년에 전국 휴전협정(NCA)에 참가한 휴전 단체입니다. 하지만 휴전이 폭력을 멈추진 않았습니다. RCSS 와 땃마도 간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고, 북부 샨주에서도 팔라웅 민족 무장단체인 TNLA, 그리고 같은 샨족 단체이자 '샨주 북부군'으로 불리는 SSPP가 전투력의 핵심을 맡은 북부동맹과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RCSS는 조직의 최정예를 세 기동부대로 나눠 북진을 하고 있습니다.
"휴전 그거,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내가 보기엔 별 소용도 없는 일이던데. 휴전한다고 땃마도랑 싸움이 끝난 것도 아냐. 약속이란 약속은 다 어기는데, 걔들 휴전 조항 들어줘봤자 뭐하나?" D가 답했습니다. "적어도 2020년까지는 우리 여단이랑 땃마도가 매일같이 치고받고 싸웠다."
"그 이후로는 싸움이 좀 잦아들었어. 그 대신 지금은 북부동맹이랑 더 많이 싸우지. 와족이랑 말이야."
RCSS는 북부동맹 멤버들에게 무기와 재원을 공급하는 와주연합군(UWSA)이 샨족이 샨족을 죽이는 동족상잔 전쟁의 배후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UWSA의 배후엔 그들과 경제적으로 공생 중인 땃마도가 있지요. D는 자기 경험을 토대로 그 심증을 이어나갔습니다. "적군이 북군(SSPP) 군복을 입고 있다지만, 벗겨보면 절반, 아니 7할 이상은 와족 병사들이야. 북군 애들이 급하다며 와족으로부터 병력을 빌려다 자기네들 군복 입혀놓고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거야."
"와족인걸 어떻게 압니까?" 제가 물었습니다. 저는 샨주에 흩어져 사는 다른 민족들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죠(...) 다른 샨족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저이는 그냥 샨족의 표본이 되는 사람이다-' 수준의 외모가 아니라면 대부분 말하는 어투를 들어보고 각 민족을 구별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알지. 예를 들어 전투지역 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면 마을에 식량이며 담배를 구하러 다니는 북군 애들이 다 와 언어를 쓴다데. 백 명이 오면 샨어를 쓰는 병사는 다섯 명이 될까 말까 한다는데, 그럼 그게 샨족이겠나?"
여단장으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요? D는 "모든 업무가 어렵지만, 무기와 탄약을 충분히 모으고, 적절한 예산을 찾아 만들어 내는 게 제일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전에 언급했듯이 샨주 남부군 여단들은 중앙에서 내려오는 무기와 탄약이 충분치 않아 부족분을 각자 농업, 광업, 또는 기업으로부터 삥을 뜯 세금을 걷는 등의 경제활동으로 충당해야 합니다. 통역을 해 준 장교가 D의 여단이 샨주에서 제일 훌륭한 차와 커피를 생산하는 여단이라고 귀띔해줍니다.
하지만 대답이 너무 간단하게 나와버려 뭔가 개운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슴속 깊이 가지고 있던 질문을 한번 꺼내봤습니다. 영 부담스러우면 답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부와 함께. 저는 RCSS 지휘관들이 그들이 청춘을 묻은 믕따이군과 쿤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만약 짜오 쿤사가 아직도 살아있어서, 샨주 남부군으로 돌아온다면, 그의 지휘를 받아들일 수 있나... 요?"
제가 질문해놓고 쫄았습니다(...) 막상 물어보고 보니 로이따이렝 한복판에 앉아서 욧석 장군의 권위에 도전하는 질문처럼 들렸거든요. D도 질문의 무거움을 알아차리고, 과자를 집어 우물거리며 잠깐 고민하다가 답합니다.
"만약 짜오 쿤사가 다시 돌아온다면... 난 개인적으로 그를 다시 지도자로 모시는데 찬성하는 입장이다. 내부 갈등이 있긴 했지만, 그건 중간 간부들의 악행 때문이지, 짜오 쿤사 때문이 아니야. 그런데... 만약 그가 정말로 살아 돌아온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샨주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포기해야겠지. 왜, 마약 갖다가 판 악명이 있잖나." D가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짜오 쿤사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 낸 사람이야. 그때 우리는 정말로 강력한 혁명군대였다."
그렇게 대답해놓고 D가 과자를 하나 더 입에 물곤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굳이 다른 질문으로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하고 생각을 하던 참에 그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있잖아, 짜오 쿤사께서 항복했을 때, 우리를 연병장에 다 모아놓고 '우리 2년 후에 봅시다!'라고 말하곤 항복하러 갔었어. 그러곤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가 잠깐 말을 멈추자 옆에 있던 장교가 얼른 통역을 해 줍니다. 말을 잇는 D의 눈빛에 추억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이 묻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짜오 욧석 부관으로 일할 시절 얘긴데, 그때가 분열이 한참 심하게 일어나서 짜오 쿤사가 샨족 지휘관들을 믿지 못할 때야. 그때 짜오 욧석이 짜오 쿤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가지고 내가 전보를 친 적이 있어. '우리는 항상 온 힘을 다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D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통역이 끝났는지 확인한 후, 말을 맺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다 커피도 이제 다 마셨겠다, 대화를 마무리할 겸 D에게 물었습니다: "샨어로는 뭐 속담 같은 거 있나요? 하루 사과 한 개면 의사를 볼 일이 없다- 뭐 이런.."
어떤 게 있을까요? 옆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던 장교들이 앉은 차례대로 이런저런 속담들을 알려줍니다. 당당한 일에 딴죽을 거는 사람을 의미하는 "코끼리 가는 길에 짖는 개" 라던지, 아니면 의미가 분명한 "슬픔을 같이해 나누고, 기쁨도 같이해 더하고" 등등.
D는 자기 차례가 되자, 아주 큰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흙바닥을 이부자리 삼아 자고, 나뭇잎을 접시 삼아 먹고, 조국을 위해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