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이 쌈, 얘 이거 미친놈이야. 얘 시민 불복종 운동하다 온 애야."
갑자기 저녁시간에 밥 먹다 말고 A가 자기 휘하 병사 중 하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얘기했습니다. 이름은 C, 키가 훤칠하고 날씬해 잘생긴 친구입니다. 평소 A는 본인이 버마족에 대해 가진 사감 때문에 현재 일어나는 미얀마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큰 애정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C도 본인 행적을 못마땅해한 상관의 갑작스러운 아웃팅에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습니다.
어느 날 저녁, 데이터가 끊긴 시간. 흡연자인 C를 위해 담배를 사다 C에게 내밀었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물었습니다.
"난 사실 직접 파업을 하고 그랬던 건 아냐. 나는 금융 사기업에서 일했으니까. 대신 학교 동창들과 함께 돈을 모아서 시위대를 지원하고, 시민 불복종 운동에 돈도 보태고 했었어. 그러고 좀 있으니까 도시에 있으면 자칫하면 잡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얼른 짐을 챙겨서 여기에 온 거야."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C는 A가 구출했다 합니다. C의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였던 A는 요청을 받고 새벽 늦게 무장차량을 도시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C를 납치하듯 태워다 로이따이렝까지 데려왔습니다. 그땐 큰 고민 없이 한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위험천만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행여나 검문소에서 막혀 잡혔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A는 C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미얀마 밖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가끔" 도와줬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런 일이 가끔 치곤 참 많았습니다. A가 잔정이 많은 사람이라 특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중 안전히 다른 지역에 도착해 아직도 A와 안부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변에서 만류해도 끝끝내 다시 도시로 돌아가 버마 하늘의 별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이 모든 게 끝나면 언젠가 썰을 풀 시간이 오겠죠? 그러리라 믿습니다.
C도 저와 같이 사회에선 미얀마 맥주며, 레드 루비며 군부가 생산한 제품을 애용했었다고 합니다. "그땐 정말 많이도 사서 피우고 마셨었어. 그런데 지금은 절대 그렇게 못하지. 그러고 싶지도 않고."
담배를 다 피운 C는 갑자기 저를 방 안에 앉혀놓고선 큼지막한 서류철을 가져와 제게 이런저런 자격증이며, 대학교 졸업장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미얀마에서 굉장히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해외에서 이런저런 금융 연수를 받은 그는 굉장한 엘리트였습니다.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도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진 모습입니다. 그 모습에서 지금의 정글 게릴라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경황없을 판에 졸업장이랑 자격증은 왜 챙겨 들고 온 거야?"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서."
위 C의 대답에서도 볼 수 있듯, 사실 씩씩하고 유쾌한 샨주 남부군 장병들 속에는 깊은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무장항쟁이 일어난 지 이제 60년도 더 넘어간 지금, 샨족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그 어떠한 지원이나 관심 없이 투쟁을 계속해왔습니다. 어쩌다 한번 조명을 받을 땐 항상 마약군벌로 인식됐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자들과 해외 전문가들이 RCSS를 마약 팔이, 또는 정치보단 사업에 몰두한 단체로 묘사할 때가 많습니다. 샨주에서 마약근절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는 샨주 남부군 입장에서 복장이 터질 일입니다.
그들은 샨주 남부군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단 한 번도 본인들 입장을 묻지 않았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언젠가 마약근절사업 담당 장교와 산책을 하며 그에게 RCSS의 마약근절사업에 대한 해외 언론의 의구심, 그리고 인권단체들의 우려에 대해 날 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뭐 마약을 파니, 마약근절센터에서 인권유린이 일어나니, 하는 얘기하는 기자들이며 인권단체들 다 알고 있어. 그거 모니터 하는 게 내 일이니까"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단 한 번도 내게 전화하거나 방문하겠다고 물어본 적도 없는걸. 너는 여기 와서 봤잖아. 그 사람들을 뭘 봤다고 그렇게 기사를 쓴 걸까?"
"우리는 무질서한 총잡이 집단이 아닙니다. 엄연한 정치조직이에요." 다른 날, 한 장교가 굉장히 유창한 영어로 말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많은 학자들이 우리와 같은 단체들을 보고 뭐, '사회 부적응자라서 그렇니, ' '제대로 된 일을 잡지 못해 돈을 벌려고 총을 들었니' 하며 얘기한다는 거. 우리네 장교들도 대학 나왔으니까 그 정도는 다 읽었습니다." 그는 담배꽁초를 집게손가락으로 꾹 쥐곤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요, 내가 돈을 벌고 싶었으면 어디 양곤이나 치앙마이 같은 곳에서 사업을 했을 겁니다. 여기 산꼭대기에서 한 달에 1400밧 받으며 있을게 아니라."
그런 샨주 남부군 장병들은 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치 자기들의 전쟁인 것처럼 관심 깊게 지켜봤습니다.그들과 함께했던 모든 식사시간은 우크라이나 전황으로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주제보다 어떤 무기가 우크라이나에서 큰 효과를 봤다느니, 얼마나 많은 지원이 우크라이나로 가느니, 얘기하며 해외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쏟는 관심에 집중했습니다.
"이근에게 우크라이나 다녀온 후에 샨주에도 와줄 수 있냐고 물어볼 수 있어?"
그들이 때때로 제게 장난스레 물었던 말입니다. 장난스레 물어봤지만, 마음속 심정은 퍽 진중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속으론 '정글 게릴라전은 이근보단 여기 샨주 전사들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마 그 이유로 와 달라고 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유튜브 등 여러 매체로 익히 본 이근의 전문성과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활극에도 열광했지만, 그의 행동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선이 큰 관심을 받게 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샨주 남부군 장병들은 아마 강대국 러시아에 맞선 약소국 우크라이나에 쏟아지는 세계 각국의 따스한 관심과 지원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법을 어기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믿은 전쟁에 투신한 이근에 대한 애정도 그 만족감의 한 부분이었겠죠.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가는 관심이 샨주엔 쉽사리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고통스럽습니다.
"어쩔 수 없지. 우크라이나는 서방 입장에서 마치 옆집과 같은 곳이잖아." 분쟁지역 관심의 비대칭에 대해 논하던 중, 같이 산책했던 마약근절 담당 장교가 제게 말했습니다. 평소 장난기가 많았던 그의 목소리엔 외로움이 묻어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달리 우리는 어디 산골짜기 정글에 박혀 잊혀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