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될만한 하루

by 이단

“ㅇㅇㅇ 부기장님? ㅇㅇㅇ 기장입니다. 모레 저랑 나트랑 가시죠? 제가 아는 워터파크가 하나 있는데 아주 좋아요. 특별한 일정 없으시면 래시가드만 하나 챙겨오세요!”


대만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뜻하지 않게 이번 레이오버 일정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오랜만의 이틀짜리 레이오버라 조용한 로컬 카페에서 글도 쓰고, 헬스도 하고, 호텔 수영장에서 여유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일정으로 인해 그런 계획이 어그러졌다.

'나도 기장이 되면 후배들을 그냥 두지 못하게 될까?'

비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사회생활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하루 정도는 양보하는 게 낫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기장님들과 동행하면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는 경우가 많다. 경치도, 음식도 훌륭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주로 혼자 조용한 카페에서 글을 쓰거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거나, 호텔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수영하는 걸 더 선호한다. 개인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런 일정이 항상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번 기장님과는 나트랑 일정 전날 도쿄 비행부터 함께해야 했기에 조종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기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도쿄 비행 동안 기장님은 나트랑에서 우리가 어디를 갈지 미리 이야기해 주셨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쁘지 않은 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트랑으로 향하는 날이 되었다. 2박 4일 일정이었는데, 눈이 많이 왔던 요 며칠 동안 쌓인 피로가 상당했다. 긴 연휴 덕분에 이번 설 연휴 동안 인천공항 이용객이 역대 최다를 기록할 거라는 뉴스가 연신 흘러나왔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조종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 반. 5시간의 비행 끝에 새벽 2시경 나트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나트랑 시내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내일 있을 기장님과의 일정을 생각하며 랜딩비어도 생략한 채 바로 잠에 들었다.


아침이 밝았고, 호텔 조식과 함께 기장님과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동남아에서 흔히 이용하는 콜택시 서비스인 '그랩'을 타고 혼총 곶(Hon Chong)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기장님은 나트랑 시내가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나뉜다는 점, 그 기준점이 어디인지, 가볼 만한 힌두교 사원은 어디인지 등을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계속 내 계획이 깨졌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여정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기장님이 알아채셨을까? 아랑곳하지 않고 기장님은 여기저기 포토 스팟에서 열심히 내 사진을 찍어 주셨다. 혼총 곶의 바다가 보이는 넓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한 후, 우리는 워터파크가 있는 리조트로 향했다.

워터파크 일정은 사전에 들은 대로였다. 머드탕, 약초탕을 거쳐 맥주 한 잔과 함께 간단한 점심을 마쳤다. 기장님은 수영장 옆 워터 슬라이드도 함께 타자고 하셨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랐지만, 덕분에 오랜만에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해안가에 위치한 리조트라 샤워 시설에서는 염수가 흘러나왔다. 찝찝한 기분과 함께 온수 풀로 자리를 옮겼다.


시설이나 주변 경관은 훌륭했지만, 친분이 깊지 않은 상사와 함께하는 일정이 계속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던 중, 기장님이 넓은 강이 보이는 수영장에 걸터앉아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 일 하면서 이렇게 좋은 곳들을 찾아다닐 수 있다는 것만큼 큰 혜택도 없는 거 같아요. 하지만 이 혜택도 부지런해야 누릴 수 있어요. 부기장님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비행해야 하니까 좋은 곳 많이 찾아다녀보세요.”

나는 형식적으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기장님과의 일정이 마무리될 무렵,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가 크루들과 저녁 식사를 위해 로비에 모였다. 베트남 최대 명절인 ‘뗏’ 기간이라 문을 닫은 가게가 많아, 어렵게 한 로컬 식당을 찾아 저녁을 해결했다.

식사를 마친 후 카페에서 시원한 망고 스무디를 한 모금 들이킬 때쯤, 기장님이 휴대폰 화면을 내게 보여주셨다.

화면에는 조종사 생활을 하며 다녔던 곳들이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일종의 여행 일기 같았는데, 부기장 시절부터 기록된 듯했다. 사진마다 누구와 함께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기장님은 사진을 한 장씩 넘기며 그때의 사연을 신나게 들려주셨다. 오래전 동료들의 이름과 특징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이 기록이 기장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껴졌다.

그제야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기장님께는 그런 하루가 아니었을까?’

자주 오는 노선이라 질릴 법도 한데, 데리고 다니시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다.

기장님께는 오늘이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을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눈치채셨겠지.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하루를 빼앗겼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선물이었다. 기장님은 선배로서 조종사 생활을 하며 즐길 수 있는 순간들을 최대한 누리길 바라셨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방법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어떤 레이오버 보다도 기록하고 싶은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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