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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Nov 19. 2019

오늘이 다행이지 못한 사람들

오늘의 행인1 : 강가에서 자전거 타던 청년들



강물은 언제나 남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땅과 저 땅을 너르게 가르며, 소외되는 것 없이 모두 다 끌어안아다가 바다로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면 한 번씩 그 강물 앞에 서본다. 한낮이 더 좋다. 반짝이는 물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때까지 강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가 깨끗해진다. 고민도 잡생각도 다 끌어안고 가주는 저 강물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저 반대편에 뭐 있었는지 아나?”
“공장 아이가?”
“지금은 그렇지. 옛날에는 문둥이 마을이었다던데.”
“문둥이 마을? 그런 것도 있나?”

자전거 여행을 온 듯한 20대 중반 정도의 두 남자는, 강 반대편 땅에 대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맞다. 그런 얘기가 있었지. 나도 어릴 때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다.




아빠의 차는 강을 끼고 있는 산 하나를 매일 올랐다. 산의 저 반대편에 있는 아빠의 주유소로 가는 길이었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물 위로 하얀 안개가 옅게 펼쳐져 있고,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이 그 위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물과 산 전부에게 환영받는 느낌. 아빠는 그걸 보며 보통은 소주 마실 때 내던 ‘캬아'하는 감탄사를 연발했고, 나는 그 넓은 풍광을 눈에 담느라 바빴다.


어느 날 ‘캬아'를 마친 아빠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어린 시절 이야기 하나를 꺼내었다. 저 강물 반대편에 뭐가 있었는지 아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당시 ‘문둥이’라고 불리던 전염병 환자들에 대한 사연으로 이어졌다.

얼굴에 진물이 나면서 결국 문드러지고 마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저 건너에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마을 밖 사람들은 그쪽으론 눈길도 두지 않았고 마을 안 사람들도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으며, 혹시 울타리 나서야 할 때는 늘 수건 같은 거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어둠을 틈타 이쪽 마을의 불빛을 훔쳐보곤 했는데, 그 눈을 마주치면 병이 옮는다고 할머니는 해지기 전이면 강가에서 놀던 아빠의 손을 끌고 재빨리 집으로 끌고 갔단다.

죄를 많이 지어 받는 벌이라 여겨졌던 병. 그래서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받고, 사람을 피하고, 얼굴을 숙이고 다녀야 했던 환자들.
'나병'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괴담이다. 두려움 때문이었겠지. 지금은 나병의 원인과 전염 경로, 치료법까지 밝혀졌지만, 몰랐던 그때는 두려웠을 거다. 몰라서, 두려워서 생겨난 괴담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길이를 함께 한다.
치료도 되지 않고 원인도 알 수 없이 일그러져가는 얼굴. 게다가 전염까지 되는 병이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만큼 독한 이유(더러운 죄와 문란한 성생활 같은)붙여, 너른 강물의 반대편으로 몰아냈다. 눈만 마주쳐도 전염된다는 소문을 만들어 철저히 외면받도록 했다.


“와... 그 시대에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자전거를 타다 말고 강물 앞에 앉아있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쪽 편에서나 저쪽 편에서나 어김없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그게 조금 섭섭했다. 그 시대에 태어나 고통받았던 사람들. 낮에는 나오지도 못하고 어둠에 숨어서야 강 건너를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 그 속절없는 눈물이 분명 몇 방울은 섞여서 함께 흘렀을 텐데, 그때도 강물은 이렇게 무심하도록 평화로웠겠지. 더없이 섭섭했고 서운했다.


강변을 따라 두 남자의 자전거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 시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자전거는 쾌활했다.
나병 환자가 치료되어 사라지면서 마을도 점점 사라졌단다. 대신 그 땅 위엔 크고 하얀 공장들이 들어섰다. 이제는 저들의 자전거처럼 쾌활해진 땅.

하지만 이 길고 너른 강물 너머 어딘가엔 지금의 시대도 다행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혹시 눈에 띌까 늦은 밤에,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로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이들. 혹은 용기내어 사람들 사이 들어갔다가 근거 없는 비난과 삿대질로 강물처럼 짙푸른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들.
다행인 자들이 이쪽에서 모른 척 사는 동안 강물 역시 모른 척 평화롭게 흐를 거고, 다행이지 않은 사람들의 눈물은 계속될 거다.


나는 강물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언제나 잠잠한 이런 강물 말고, 굽이쳐 넘치기도 하고 땅을 가르기도 하는 강물을 찾아보기로. 눈물마저 잠잠히 안고 가는 강물 말고 소리내어 함께 울어대는 강물 앞에 서보기로. 그래서 그 반대편을 살필 수밖에 없는 강물을 닮아보기로.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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