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토마스 듀잉
널따란 장방형 대리석 식탁 위에 두 여인이 앉아 있다. 대리석의 무늬며 투영되는 그림자가 식탁의 차가운 질감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정면의 여인은 목하 독서 중이다. 하지만 왼쪽의 다른 여인은 책없이 그냥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 중인가. 그렇다면 아마도 왼쪽의 여인이 정면의 여인보다 나중에 식탁에 다가와 말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식탁에 올려 놓은 왼손에는 중앙의 화병에서 꺼내 들은 것처럼 보이는 흰 꽃 한 송이가 거꾸로 들려 있다. 이야기의 화제는 이 꽃송이였을 게다. 그러고 보니 화병의 꽃송이들도 조금씩 아래로 쳐져 있다. 시든 꽃 송이를 보고 그네들은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음을 서로 한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마스 듀잉(Thomas Wilmer Dewing: 1851-1938)은 보스톤 태생의 미국 화가이다. 파리 줄리앙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미국화가 텐 그룹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며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가르쳤다. 그는 영국 유미주의에 뿌리를 둔 미국 회화 장르중 하나인 색조주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가 선호하는 예술적 표현 도구는 꿈꾸는 것같은 몽환적인 분위기 속의 기품있는 여인들이다. 이들 여인들은 실내에서 책도 읽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편지를 쓰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아니면 야외에서 꽃을 따거나 소요하기도 한다. 관람자는 그림이 전개되는 특정한 상황에서 대한 참여자라기보다는 목격자로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이나 여인들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있는 느낌을 준다.
듀잉이 그린 여인들의 그림은 신비감이 넘치는 은은한 색조에 힘입어 신화 속 장면들처럼 보인다. 현대의 신화화인 셈이다. 탈속의 여신들과는 달리 범속한 인간은 유한하다. 흔히 화무십일홍이라 한다. 뭇여인들의 아름다움 역시 젊어 한때이다. 이것이 아쉬워 젊어서들 사진을 찍어 놓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놓기도 한다. 듀잉 역시 결코 시들지 않을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꽃이 십 일이 넘어서도 지지 않고 계속 붉다면 그건 꽃이 아니다. 플라스틱 조화이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기 때문에, 부정되기 때문에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