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그레구아르
한 여인이 식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식탁 위에는 초록색 병이랑 찻잔과 주전자 일부가 보인다. 여인의 차림새를 보면 머리에 수건을 한 것이며 편안한 가운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욕 전후이거나 취점 전의 모습인 것 같다. 머리에 수건을 싼 모양이 이색적이고 특이하다. 여인은 책을 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한 손가락으로 보던 책의 페이지를 누른 채, 턱을 괸 고개를 돌려 딴생각 중이다.
책을 읽다 보면 종종 경험하는 일이다. 읽던 문장 중 멋진 표현을 만나면 잠시 그것을 음미하기도 하고, 책의 내용이 과거의 비슷한 다른 일들을 일깨워 잠깐이나마 회상에 빠져 들기도 한다. 집중력을 기울여 몰입하는 독서도 좋지만 이처럼 딴생각을 품게 하는 독서도 나름 의미가 있다. 작중 화자나 저자의 논급이 독자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에 대한 재해석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때로 단어 하나를 통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불명료했던 상황에 대한 파악이 명료하게 정리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케네 그레구아르(Kenne Gregoire: 1951~ )는 테터링겐 태생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네덜란드 신사실주의 운동에 관여하였으며, 정물화나 인물화를 통해 보다 초현실적인 장면들을 그리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인간의 비애나 다른 복합적 감정들을 보여 준다.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 사조는 사물이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색채를 사용하거나 한 화면에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병열시킴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그림에서도 공존할 수 없는 두 시점을 동시에 화폭에 담고 있다. 먼저 여인을 그리는 시점은 거의 정면에 가깝다. 하지만 책을 비롯한 식탁 위 사물을 그리는 시점은 거의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시점이 동시에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총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시점이 필요하다. 늘상 보던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보고, 늘상 하던 생각 말고 다른 생각, 즉 딴생각도 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