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가와세 하스이
어두운 밤, 열린 창 너머 가까이로 작은 섬 하나 바다 속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다. 밤바다는 검푸르고 밤하늘도 검푸르다.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누운 촌락의 노란 창 불빛들이 물결따라 일렁거리며 깊고 푸른 밤을 위무하고 있다. 사위가 고요하여 적적한 듯 보이지만 아마도 멀리 숨죽인 파도 소리가 잦아들었다 몰려왔다 하며 나그네 마음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난간 위에 매달린 등불 꽃 그림이 홀로 화사하다.
섬은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지역에 있는 에노시마이다. 그림은 바닷가 건물 2층 베란다에서 이 에노시마가 떠있는 바다를 조망하고 있다. 이 그림은 가와세 하스이가 그린 목판화로로 달력의 8월 달 그림으로도 쓰였다. 가와세 하스이(川瀨巴水 Kawase Hasui: 1883-1957)는 일본의 우키요에의 뒤를 이은 20세기초 신판화로 유명한 화가이다. 그는 600여개 이상의 목판화를 제작하였다. 초기 저작에서 그의 전형성을 볼 수 있는데, 불행히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모두 파손되었다. 그는 일본의 경승지를 돌아다니며 풍경들을 드로잉하여 작품화하였는데, 그의 판화 대부분은 수채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가와세 하스이는 그의 나이 56세 때인 1939년 조선에도 들려 <조선팔경>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이 시리즈는 당시 경성이나 평양, 개성, 수원, 경주, 금강산 등지를 여행하면서 그린 주요 경승지의 풍광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경회루, 수원성, 불국사, 낙화암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들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이어 1940년에도 다시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팔경의 속편격인 <속조선풍경> 시리즈도 제작하였다. 조선의 풍광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건축물 뿐만 아니라 이를 배경으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성문 옆 개울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라든지 봄꽃이 핀 명승지 근처에서 꽃구경 나온 사람들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 풍속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