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훌리오 로메로 드 토레스
전면으로 머리에 검은 망사를 쓴 젊은 여인이 앉아 있다. 여인은 손에 책을 들고 보다가 눈을 들어 정면으로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제목으로 보아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찬송가책이다. 왼쪽 후경으로는 창문 밖 풍경이 보인다. 얼핏 보면 창문 바깥 풍경은 흡사 벽에 걸린 그림처럼 보인다. 건물과 광장이 보이고 광장에는 높다란 기념비가 솟아 있다. 이 광장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코르도바 시의 광장이며 기념비는 대천사 라파엘 기념비이다. 그 앞으로 베일을 한 여인이 코르도바식 망토와 모자를 쓴 남자의 손짓에 응대하고 있다. 사랑을 간구하고 있는 장면일까. 반면에 정면의 여인이 간구하고 있는 것은 신의 사랑이다. 성과 속의 두 가지 사랑에 대한 간구가 서로 대비되면서 한 그림 안에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신의 사랑을 간구하고 찬양하는 여인의 이미지가 세속의 사랑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단아하다. 심지어 더 에로틱하게 보이기까지 하니 역시 세속의 눈일 수밖에 없다. (聖俗)
훌리오 로메로 드 토레스(Julio Romero de Torres : 1874-1930)는 코르도바 태생의 스페인 화가이다. 그의 아버지 라파엘 로메로 바로스도 화가여서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으며, 마드리드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유럽 전역을 돌며 견문을 넓히는 과정을 거쳐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화풍으로부터 자신만의 상징주의 스타일을 정립하였다. 안달루시아 풍의 그의 그림 소재 역시 성속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여인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한편으로는 성경 속의 인물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멩고댄서와 같이 현실의 범속한 인물들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림 속 여성 이미지가 다른 상징주의 화가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가 그리는 여성들의 강렬한 눈빛이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그만의 독특한 빛깔을 보여 준다. 그의 고향인 코르도바에 훌리오 로메로 드 토레스 미술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