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 지평선

28- 마티스

by 유시

연자주빛으로 멀리서 바다가 넘실거린다. 맨살을 드러낸 여인의 왼팔이 창틀의 손잡이를 잡고 막 문을 열려는 순간이다. 창밖 노을은 바다뿐 아니라 하늘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야자수 심어진 해변가 모래사장으로 두어 사람의 형체가 지나간다.

석양 빛을 받은 여인의 살색은 조금 어둡게 표현되었지만 원래는 더 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흰 팔에 어느 사내가 매료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프랑스의 시인 막스 자콥이 읊은 대로.


그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다

- 막스 자콥, 지평선(전문)


놀라운 시적 상상력이다. 여인의 팔이 지평선이라니. 세상 사내들의 모든 꿈도 다 담을 수 있는 지평선을 가졌으니 여인들의 품은 얼마나 넉넉한가. 그 지평선이 지금 창 너머 수평선을 만나고 있다.

<해질녘 창가의 젊은 여인>은 앙리 마티스가 1921년에 그린 것이다. 야수파의 대표적 화가인 마티스는 이외에도 창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다. 일찌기 1905년에 그린 <열린 창> 이후에도 계속 이 주제로 되돌아와 다수의 그림을 그렸다. 니스나 에트레타에서도 그렸고, 말년인 1940년대에도 창 그림을 많이 그렸다. 대개는 열려 있는 창을 배경으로 인물이 없는 실내 정경이거나, 창문 밖 바닷가를 배경으로 창가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여인들 그림이다. 창 바깥에 바닷가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마티스가 마흔여덟살인 1917년부터 니스로 와서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37년 동안이나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니스에 마티스미술관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화사한 색채를 자유자재로 쓰면서 야수파로서의 자신의 화풍을 개척해 나갔던 마티스는 말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던 또다른 지평선을 만났다. 1935년부터 리디아라는 러시아 태생의 젊은 여인이 모델로 등장한 것이다. 리디아는 처음에 아틀리에의 조수였는데, 1934년에 부인인 아멜리가 병이 나자 간병인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다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마티스의 정식비서 역할을 맡게 되면서 아틀리에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리디아의 큰 골격의 건장함이 주는 새로운 매력에 눈뜬 마티스는 그녀를 캔버스 앞에 세우게 되었고 그녀는 마티스의 뮤즈로서 미술사에 등장한다. 그녀를 모델로 그린 작품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푸른 눈>을 보면 그녀의 이목구비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말년의 노화가 마티스의 새로운 지평선이었던 리디아, 그녀의 하얀 팔이 시원시원하다.

마티스, 푸른 눈, 1935, 캔버스에 유채, 38.1×45.7cm, 볼티모어미술관

부인이었던 아멜리는 이들 둘의 관계 진전으로 결국 1939년부터 마티스와 별거를 하게 된다. 그때 마티스의 나이는 70세였다. 리디아는 마티스가 말년에 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웠을 때에도 충실하게 그를 간병하면서 곁을 지켰다. 모델이자 연인으로, 친구이자 동료로서 사랑과 존경을 담아 헌신한 그녀였던 만큼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도 리디아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으니 나중에 마티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힌 이는 40여년 가까이 부부로 지냈던 아멜리이다. 옛 지평선의 의지가 담긴 회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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