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퇴사일기, D+44
나는 20살 이후 나를 제대로 돌아보고, 또 쉬기 위한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교 때는 그 흔한 휴학 한 번 하지 못하고 졸업하였고, 이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근 10년 간 휴직 한 번 없이 회사를 다녔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나도 모르는 약간의 번아웃이 왔었던 것 같다.
입사 초반에는 자기계발을 위해 주말에는 시간을 쪼개어 꼬박꼬박 영어 회화 학원도 다니고 책도 계속 읽어왔는데, 뒤돌아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런 것들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 마치 바다 위에서 힘차게 노를 젓던 배가 어느 순간 손에서 노를 놓치고는 그냥 파도가 이끄는 대로 배가 흘러가게 되는 그런 것처럼 말이다. 무기력함, 그것이 언제부턴가 내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퇴사한 후에 내 일상에 휴식을 주고자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한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못했던 터라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마침 남편도 이직을 하는 과정에서 두 달의 공백이 생겨 같이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영국 런던, 포르투갈 포르투, 리스본, 스페인 세비야, 론다, 말라가, 그라나다, 무르시아, 발렌시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총 11개의 도시를 여행하는 나름의 대장정. 한 달간의 여행이라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우선 혹시 여행 중 코로나19에 감염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예방 차원에서 백신을 추가 접종하였고, 집을 오랫동안 비워놔야 했기 때문에 냉장고에 있는 각종 식재료들도 몽땅 정리하였다. 밀린 빨래도 전부 빨아서 건조기를 돌리고 널었다.
우리는 11개의 도시를 계속 이동하면서 여행할 계획이라 짐은 최소화하고자 했다. 보통 여행갈 때는 여분의 옷도 많이 가져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도시 간 이동 시 저가항공도 이용해야 했는데, 저가항공 규정 상 개인당 수하물의 무게가 20kg을 넘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옷은 일주일정도 입을 것을 챙겨 중간 중간 빨래를 하기로 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예약한 숙소 근처에 코인 세탁방이 있는 도시가 많아 빨래를 하기 수월했다는 것이다. 장기 여행자들에게는 빨래만큼 귀찮은게 없는데, 세탁과 건조를 합하여 10유로 내로 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그리고 여행하는 도시 모두 늦겨울에서 초봄 즈음의 날씨였는데, 유럽은 온돌방이 없어 1인용 미니 전기장판을 2개 사서 들고 갔다. 해외여행용 프리볼트로 되어있는 제품이었는데 여행 후 돌아봤을 때 가장 유용했던 물품 중 하나다. 2-3월쯤에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한 번 고려해보시길.
다시 이 글의 주제로 돌아와서 한 달 간의 여행은 큰일 없이 무사히,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은 몸은 아직 시차적응 중이지만 정신은 풀 충전된 느낌이다.
나는 원래 계획 짜기를 좋아하는 J형 인간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패키지 관광 여행처럼 여행하기보다는 그때 그때 가고 싶은 곳을 정해서 여행하였다. 더 많은 곳을 둘러봐야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그날 그날 우리의 컨디션에 따라 장소와 음식을 정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충분히 눈에 담고,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온전한 쉼을 즐겼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인생 2막을 위한 도약, 그리고 삶을 더 열심히 살기 위한 이유도 명확해졌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과 먹어볼 것이 많은데, 이것들을 다 경험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많이 억울할 것 같다.
여행을 통해 나를 충전했고 봄도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 도약할 차례이다.
Get, set, ready and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