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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 B의 삶

지나고 보니 나쁘지 않습니다.

by Flying Shrimpy
Plan B(플랜 비)

'보완책, ' '대안책, ' '차선책.'
기존의 계획이 통하지 않을 때, 상황이 변화했을 때, 비상시가 도래했을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사태의 대비하고자 할 때 등의 상황을 위해 준비하는 '대체 계획'을 의미한다.
기존의 계획을 지칭하는 'Plan A'의 상대되는 표현으로 쓰인다.


잠시 짬을 내어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나는 꽤 여러 번 누군가의 Plan B였다.

조금 씁쓸하지만 그 결과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었기에, 모아서 기록해 본다.




1. 인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가고 싶었던 회사의 인턴 모집 공고가 떴다.

현직에 있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다듬어 제출했다.


며칠 후, 서류전형에 합격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꿈꾸던 회사의 건물에 처음으로 가볼 수 있게 되어 설렜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예상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순발력 있게 내어놓는 능숙함도 없었고, 심지어 가고 싶었던 곳이라 과하게 긴장해서 두서없이 떠들었다.


결국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상심하면서 며칠을 보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왜 떨어졌는지 물어라도 볼까?'

내가 너무 일찍 지원한 것이 문제라면 나는 그 해에는 인턴 자리를 찾고자 애쓰기보다는 공부, 여행, 어학연수 등에 시간을 쓰기로 결정하면 되고,

부족한 스펙이 문제라면 졸업할 때까지 2년이나 남았으니 그동안 그 부분을 보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물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불합격 통보 메일에 정중히 답장을 보냈다.

귀사에 정말 입사하고 싶은데, 바쁘시겠지만 혹시 보완할 점을 알려주시면 추후 기회가 될 때 다시 지원하고 싶다고.

그리고는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며칠 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출근할 수 있겠냐고…!


알고 보니 팀에서 최종으로 결정한 인턴이 있었는데, 다른 기업과 중복으로 합격해서 이 회사에는 출근 취소 통보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인사팀과 내가 가게 될 팀에서 상의 후, 후순위였던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입사 후 점심식사 때 팀장님 말씀으로는, 메일을 받고 얘는 뭘 시켜도 해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업무 특성상 국내든 해외든 클라이언트들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그런 일을 잘할 것 같았다고 하셨다.


내가 그들의 선순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잠시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가보고 싶었던 회사에서 일을 해볼 수 있었으니 정말 기뻤다.

그곳에서 한 첫 사회생활을 통해 정말 많이 배웠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서 만난 좋은 사수 분들과 연락하고 지내고 있으니,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2. 첫 회사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 후, 이번에는 정규직 신입사원으로 한 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회사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입사 전부터 원하던 팀이 아닌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


2년쯤 지났을까. 원하던 팀에 자리가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회사의 인사팀은 뭘 잘못해야(...) 불려 가는 곳이라는 인상이 강해서, 그 팀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어떤 경로로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 잘 몰랐다.


다만, 해당 팀과 여러 번 협업을 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최선을 다했다.

바쁜 날에도 그 팀과 메일과 전화로 소통할 일이 있으면 친절하게 응대하려고 노력했고, 요청하는 자료는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서 전달했다.

하루는 그 팀에 계시던 과장님 한 분이 개인적으로 연락하셔서, '입사 때 우리 팀에 오고 싶어 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직도 생각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보셨다.

팀원들이 일을 잘하는 만큼 일이 몰려 야근이 많은 팀이라는 추가 정보를 들은 터라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결심하여 팀을 옮기게 되었다.


이 때도 합류 후 비하인드를 들었는데, 당시 1순위였던 분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일도 잘하시고 성격도 좋으셔서 평판이 좋던 분이었다.

팀에서 그분께 먼저 제안을 했는데, 그분은 기존 팀에 만족해서 옮길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입사 때부터 그 직무에 가고 싶다고 써냈고, 여러 번 협업을 했는데 업무 처리 능력이 나쁘지 않았으며, 그리고 다시 연락했을 때도 가고 싶다고 승낙한 내가 가게 된 것이다.


팀을 옮긴 후 종종 일이 힘들어 '내가 왜 여기 온다고 자원했을까...'라고 후회하던 때도 있었다.

입사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다시 실질적 신입이 되어 처음부터 일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고, 업무 강도도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 있던 팀보다 훨씬 전문성이 높은 업무를 했고, 클라이언트의 범위도 넓어졌으며, 마지막 연차에는 공부에 대한 갈증이 생겨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결론적으로는 잘 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옮긴 팀의 직속 사수가 퇴사 때 해주신 말씀이 수험 때도, 변호사가 된 후 어려운 사건을 맡았을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넌 이 팀에서 버텼으니 어디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

몇 년간 우리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문보영 작가의 '준최선의 롱런' 엽서


3. 연애


이것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은 나의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 꺼내놓는 것도 민망하지만 주제와 맞는 이야기이기에 함께 쓴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미팅과 소개팅을 하던 때였다.

동아리방에서 동기들과 놀고 있는데, 한 선배가 와서 자기 친구와 한 번 만나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세상에, 하얗고! 키도 딱 적당하고! 말도 조근조근 예쁘게 하는! 그런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시 이상형이 없었는데, 이 사람을 본 순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상대방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해서 애프터, 삼프터(요즘도 이런 말 쓰나요?)를 하고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개팅의 주선자가 문제였다.

남자친구를 소개해 준 선배는 늘 '나쁜 의도는 없으나 말이 필터를 거치지 못하고 나오는' 그런 분이었는데, 우리가 사귀게 된 후 선배 커플과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사실 A(다른 동기)가 너보다 좀 더 예쁜데 얘 이미지가 너랑 더 잘 어울려서 너 소개해준 거야~ 이렇게 잘 어울릴 줄 알고 있었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은 종일 속이 상했지만, 어쨌든 그분 덕분에 성인이 된 후 첫 연애를 좋은 사람과 하게 되었으니 내가 주선자의 2순위였어도 감사하다.




내가 누군가의 Plan B로 어떤 과정을 시작했더라도

어쨌든 그 조직에 들어가서, 혹은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서,

그들의 Plan A만큼의, 나아가 그 이상의 좋은 선택지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서운했던 것은 금방 잊히고, 순위와 상관없이 서로의 인생이라는 과정의 좋은 한 부분으로 기억되는 듯하다.


사실 이 글은 지금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이직처에게도 내가 Plan B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뭐 그럼 어떻냐!'는 마음에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합격한 다른 회사가 있는데(오늘 쓴 글과는 반대로 회사가 나의 Plan B인 경우이다), 그곳에 가더라도 예상치 못한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으니 기꺼이 가고자 쓴 것이다.


많은 것이 결정될 다음 주쯤에 다시 브런치로 돌아와 이 글을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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