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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전이"라고 말했고, 나는 소주와 회를 샀다.

by 수평선너머

7월 28일 월요일 방학을 했다.

병원 투어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병원 투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어. 나 암 걸렸어.”

“어… 그래? 음… 힘들겠다.”


대문자 T인 나는 위로가 어렵다. 주는 것도 어렵고 받는 것도 어렵다.

그런 내가 암에 걸렸을 때, 나는 주변 이들의 반응과 위로가 참 어려웠다.


대부분의 이들은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날 걱정하는 그 호의에 나는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심통이 난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생각해서 하는 모든 말에 토를 달기 시작한다.


“갑상선암 그거 별거 아니래. 진행속도가 늦어서 거북이암이나 착한 암이라고 불린대. 너무 걱정하지 마.”

'날 생각해서 내 걱정을 덜어주려 하는 말인 줄은 알겠는데... 암에 착한 게 어딨어?'


“음. 어떡해? 괜찮아요? 가족들이 많이 놀랐겠어요. 너무 걱정 마요. 다 잘될 거예요.“

‘괜찮다고 말해야하나? 괜찮지않아요라고 말하면 사회성 망한것처럼 보이려나’


내 성격 참 모났다. 왜 위로에 이렇게 삐딱한 것일까? 왜 걱정하는 마음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남 이야기 전에 나부터가 주변 사람이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위로가 어렵지 않았던가.


20대의 나

대학친구: 야. 나 갑상선암이었어.

나: 그래? 그게 뭔데? 심각한 거냐? 왜 얘기 안 했어?

대학친구: 뭐 그땐 그냥 임용준비하느라 바빠서. 뭐 죽을병도 아니고.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야. 그냥 평생 호르몬 약만 먹으면 되는 거야.

나: 그래? 그래도 건강 생각해서 술은 좀 줄여라. 너 대학 때처럼 파도는 좀 그만 타고. 우리가 애도 아니고. 술 아껴 인마.


30대의 나

나: 갑상선암이라며? 왜 연락도 안 하고?

직장동료: 나도 경황이 없었지.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초음파 하다가 발견했는데, 막 전이되고 그런 거 같다고 난리였어. 급하게 대학병원으로 연계해 주고 거기서도 급하게 수술일정 잡아줬어.

나: 에고. 어쩌다가 그랬대?

직장동료: 다행히 수술하려고 열어봤는데 전이는 아니라고 하더라. 그래서 수술받고 요양하고 지금은 괜찮아졌어.

나: 응. 친구 중에도 10년 전엔가 갑상선암 수술한 친구 있는데, 멀쩡하게 잘 살더라고.


되돌아보면 그때의 나보다는 지금 내 주변이들의 위로가 더 훌륭하지 않은가? 무관심했고, 부주의했다. 심지어 난 직장동료가 갑상선암뿐만 아니라 유방암에 걸렸던 것도 몰랐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니 암환자가 제법 있었다. 경미한 암에서 제법 심각한 암환자도 있었고, 나는 그들 모두에게 무심했다. 암에 경미함과 심각함을 이야기하는 것부터가 F보다는 T의 자질이 엿보인다.


이 같이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했던 나에게, 나의 아픔을 공감해 달라고 할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암 진단 사실을 주변에 널리 알리지 않았던 지인들의 심정이 그때야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이 마음을 어떻게 견디었던 것일까?


무슨 호들갑이냐 싶지만 ‘암’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컸다. 괜찮은 척 생각하지 않은 척했지만 2달 정도는 잠이 오지 않고 ‘죽음’과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데 그것도 잊히더라. 시간이 흐르고 매일이 밀려드니까 익숙해지더라…


다시 물어보고 싶다. 친구가 혹은 가족이 이렇게 말할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나 갑상선암 걸렸어.’


내 이야기지만 나는 여전히 어떻게 답변을 줘야 할지 모르겠다.


방학을 앞두고 내 생각은 수술로 기울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암세포를 몸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진단을 받았던 대학병원에 연락을 했고, 추가적인 검사를 받았고, 더불어 다른 대학병원도 알아봤다. 원래 다들 수술날짜는 잡아놓고 검사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병원 빼고 취소하는 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정이 밀려 원하는 병원에서 수술받는 일이 어렵다고 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예약하려니 지난 검사대비 시간이 지나 몇 가지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CT 검사를 받았다. 뭐 이렇게 처음 받는 검사가 많은 것일까?


CT 검사는 오전에 이루어졌고 오후에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내 CT 검사 결과가 띄어진 모니터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우스 휠을 드르륵 돌리는 소리만 진료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의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길어봤자 1-2분인 그 침묵의 시간이 나에게는 꽤 길게 느껴졌다.


“음. 아무래도 임파선에 전이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임파선에 세침검사 받아봅시다.”

“심각한 건가요?”

“음. 수술 범위가 좀 더 늘어나고, 입원 기간이 일주일 정도로 늘어날 거 같네요. 10명 중에 3-4명은 임파선 전이까지 이루어져요.”

“수술을 안 할 수는 없겠죠?”

“네, 전절제로 수술하셔야 합니다.”


갑상선암 수술을 할까 말까 내지는 수술방법에 대한 지난 몇 달간의 고민은 무의미해졌다. 의사와의 면담을 종료하고 수술코디네이터와 일정을 조율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오랜만에 소주와 회가 땡긴다고 이야기했다. 집 앞의 통큰회 직판장에 갔다. 여러 메뉴를 살펴보는 척하다가 광어와 우럭을 주문했다.


처음 회를 먹었던 것은 대학에 와서였다. 어린 시절 횟집을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를 싫어했던 나는 스끼다시라고 불리는 밑반찬만을 먹었다. 그중에서도 콘치즈를 가장 좋아해서 2-3번 리필해서 먹곤 했다. 아마 부모님은 회는 하나도 집어먹지 않고 콘치즈로만 배를 채우는 나를 예뻐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학에 와서도 회를 즐겨 먹지는 않았다. 가격도 비쌌을뿐더러 아무런 맛이 없는 초장맛으로 먹는 맛 떼가리 없는 음식이었다.


30대가 되어서도 비슷했다. 하지만 소주와 묘하게 어울리는 쫄깃한 식감이 생각나서 회를 먹고플 때가 있었다. 몇 점은 초장이 아니라 간장에 찍어서 회의 맛과 식감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초장에 찍어먹기를 즐겼다.


회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2가지 회는 기억에 남았다. 하나는 가락시장에서 배달시켜 먹은 모둠회였고, 하나는 제주도 모슬포항에서 먹었던 고등어회였다.


분당에 사는 친구의 집에 집들이를 갔던 날이었다. 갑상선암 걸렸던 대학친구다. 술을 사랑하는 친구답게 안주를 잘 알고 있었고, 회를 먹고 싶다 하니 가락시장에서 주문하면 된다고 했다. 가락시장 서울 아니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하며 촌놈 보듯이 나를 보곤 친구는 회를 주문했다.


1시간가량 뒤에 도착한 회는 예쁘게 썰렸다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평소 먹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아 조금 크기가 커 보이기는 했다. 왜 분당에서 퀵비를 꽤 주고 시키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이유를 깨달았다.


우리가 주문한 모둠회는 대방어와 광어, 참돔, 연어 구성이었다. 방어를 여러 번 먹어보기는 했지만 5kg 이상의 대방어를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손가락 한마디의 절반 정도일까? 두껍게 썰린 대방어는 맛있어 보였다. 겉은 옅은 분홍빛과 희끗한 지방층이 끝부분에 보였다. 한 젓가락 집어 간장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간장의 짭조름한 맛과 와사비의 톡 쏘는 맛 사이로 방어살의 단단한 탄력이 느껴진다. 씹을수록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단맛이 혀 끝으로 전달되었다. 입안 가득 채우는 거대한 회의 만족감도 좋았다. 그렇게 광어, 참돔, 연어를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먹었고 잔을 채웠고 시간을 나눴다. 첫 한 점만 이렇게 맛있었고, 나머지는 술에 취해 초장맛으로 먹은 것은 비밀이다.


두 번째로 먹었던 회는 제주도 모슬포항에서 먹었던 고등어회다. 원래 모슬포항은 방어로 유명한 항구다. 하지만 나는 모슬포를 여름에 방문했었고, 아쉽게도 방어철은 겨울이었다.


글쎄? 여러 관광객들의 이견이 있겠지만 모슬포항에서 고등어회로 유명한 식당이 두 군데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식당 하나는 휴무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식당으로 향했다. 7월 초 아직 성수기를 맞지 않은 평일의 제주도는 한가했고, 아무런 웨이팅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고등어회를 주문했고 약간의 시간 뒤 보게 된 고등어회의 모습은 나를 당황시켰다.


일단 두꺼웠다. 대나무 발 위에 두터운 회 조각들이 일정한 간격과 배열로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고등어회를 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고등어회는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고등어 특유의 붉은 살과 은빛 껍질 무늬가 교차되어 일반적인 회와는 느낌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고등어는 회로 먹지 않는다. 신선한 상태에서 잡은 직후 손질해 바로 먹어야지만 비린내가 나지 않기에 바닷가 근처에서만 맛볼 수 있다. 보통은 제주도 관광지 근처의 시장에서 고등어회를 맛본다.


하지만 모슬포의 고등어회와 시장의 고등어회는 달랐다. 팩에 담겨있는 상태가 아닌 주문 즉시 손질되어 나온 회는 역시나 손가락 마디 절반 정도로 두꺼웠다. 두꺼운 고등어회를 한 점 집어 같이 제공되는 김에 싸서 한 입에 집어넣으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일단 비린내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씹으면 처음에는 단단한 살의 조직감이 느껴지다 부드러움과 함께 고소함이 몰려왔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움 그 경계에 있는 식감이었다. 어찌나 고소했는지 대나무 발 위의 고등어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던 기억이 남는다.


40대에 들어선 내가 좋아하는 회는 신선하고 두꺼운 활어회다. 집 앞의 통큰회 직판장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 준다. 광어나 우럭 중 무엇을 시킬까 고민하다 언제나 광어반 우럭반을 주문하지만 사실 난 광어와 우럭의 맛 차이를 모르겠다. 그냥 씹는 맛에 먹는다. 초장반에 쌈장 반, 다진 마늘 더 추가 그리고 용량 큰 것 사서 소분해서 냉동고에 얼려놓은 생와사비를 마구 섞은 소스맛에 먹는다. 두꺼울수록 소스가 많이 묻고 씹는 시간이 길어진다. 거기에 소주를 곁들이면 크으! 그게 최고다.


병원을 다녀오고, 집 앞 횟집에서 회를 포장해 왔고, 차가운 소주를 꺼내 마시며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병원 가서 검사받았어. 그냥 수술받으려고. 이거 저거 알아보는 것보다 수술받는 게 마음이 깔끔할 거 같아. 몸속에 암세포가 있다는 걸 알면서 살기는 힘들 거 같아.”


난 아내와 수술 일정과 필요한 물품 등을 이야기 나누었다. 임파선에 전이가 되어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냥 두꺼운 회를 초장맛에 씹으며, 소주나 마시고 취하고 싶었다. 맨 정신으로 보내기에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래도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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