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작년에 학교를 옮겼고, 1학년 아이들과 함께 한 해를 보냈다. 다사다난한 해였다. 학교까지 출근하는 시간도 제법 걸려, 집 인근에 새롭게 개교하는 학교로 옮길까 고민하던 차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대로 남기로 했다. 올해는 6학년 아이들과 지내게 되었다.
6학년은 재미있는 학년이다. 요즘은 사춘기가 예전보다 훨씬 이르게 찾아온다.
“선생님, 길동이가 기분 나쁘게 쳐다봐요.”
“길동아, 무슨 일이야?”
“안 그랬는데요. 오히려 제 기분이 나쁜데요?”
다른 친구를 불러 물어보면 둘이 어제 학원에서 싸웠다고 한다…
어제까지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친구가 오늘은 불러도 대답도 안 한다.
그래, 6학년이란 그런 나이인 것이다.
그럼에도 교사 경력의 절반 정도는 6학년을 담당했던 것 같다. 굳이 맡으려 하지도 않았고,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였다.
올해는 함께 일했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6학년 부장을 맡았다. 평소 좋게 보인 면이 많았는지, 사춘기 기강을 잡는데 남교사가 필요하기도 해서인지 그 선생님께서는 함께 6학년을 하자고 제안했다.
옮긴 학교를 1년 만에 떠나는 것에 대한 찝찝함도 있었고, 내가 뭐라고 제안을 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작년에 함께 했던 기억이 좋았다. 결국 ‘1년 열심히 으쌰으쌰 해서 말 많은 사춘기 아이들 무사히 잘 졸업시켜요’로 올 초 함께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한 바탕 지나가고나니, 동료 선생님들에 대한 미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한 배를 타고 졸업이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일원인데 나만 중간에 배에서 내리라는 요구를 받은 느낌이었다.
4월 18일, 대학병원에서 나는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쉽사리 치료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갑상선암이라는 병이 개인차가 너무 커서 콕 집어 하나의 치료법을 고집하기도 어려웠다. 수술 여부부터 시작해서, 받는다면 어느 시기에 받을지와 수술 이후에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해야 할지도 알기 어려웠다.
갑상선암 반절제 수술의 경우 보통 2박 3일의 입원이 이루어지고, 전절제 수술의 경우 3박 4일 입원이 이루어진다. 퇴원 후 요양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자영업자 중에는 퇴원 당일부터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2주 내외의 요양 기간을 가진다고들 한다.
교사는 목소리로 일하는 직업이다. 어떤 방식의 수술을 택하고, 어느 정도 쉬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교사의 경우를 보아도, 누구는 한 달만 쉬고 바로 수업이 가능했다더라, 누구는 세 달 쉬고도 목소리가 잘 안 나와 결국 여섯 달을 쉬고 나서야 수업이 가능했다더라 등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갑상선은 성대 및 후두 신경과 매우 인접한 위치에 있어, 수술 과정에서 신경이 자극되거나 손상될 수 있다. 수술 후 쉰 목소리가 나거나 말할 때 피로감이 느껴지는 일이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엄정화는 갑상선 수술 과정에서 성대 한쪽이 마비되어 8개월간 말을 하지 못했다고 했으며, 이문세는 갑상선암 투병 중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성대 쪽 암을 제외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누가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이 모든 어지러운 상황을 6학년 부장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전화를 했던 것 같다.
“선생님… 나 올해 초, 아이들 졸업까지 1년 같이 하자고 했던 약속 지키기 어려울 거 같아요... 갑상선 검사했던 거 알죠? 암이라고 하네요.”
초등학교 시절을 잘못 기억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누군가는 초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고, 아침조회나 종례를 제외하고는 교무실에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초등학교에서는 한 명의 담임교사가 한 개 반의 대부분 수업을 실시한다. 영어, 체육, 과학 등의 교과를 주로 전담교사가 진행하며, 중·고등학교와 달리 그들은 담임을 맡지 않는다.
담임교사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시간을 교실에서 보낸다. 업무도 당연히 교실에서 본다. 중고등학교와 달리 교무실에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실로 출근하고, 교실에서 퇴근하는 삶을 살다 보면, 교장이나 교감은 물론 다른 학년 선생님은 얼굴 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초등학교는 아무래도 교과 지도보다 생활지도의 비중이 높다. 학년 전체에게 안내해야 하는 공동의 규칙과 그 실행이 중요하기에 자주 만나 협의해야 할 일이 많다. “1반 청이가 2반 영희한테 욕하고, 3반 철수는 둘이 싸우라고 부추겼어요” 같은 사건이 한 달에 한 번은 발생하기에 각 반 담임 선생님 간에 긴밀한 협조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같은 학년이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학년 전체를 총괄하는 학년 부장의 역할 비중이 높다. 아마 내 전화를 받은 6학년 부장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갑상선암에 걸린 나를 걱정하며, 여러 유명한 병원들의 정보를 보내줬었다.
며칠 뒤, 출근한 나에게 6학년 부장은 물었다.
“뭐 먹고 싶어요?”
무심코 나온 대답이 ‘아웃백’이었다.
내가 대학생활을 보냈던 시절은 패밀리 레스토랑의 전성기였다.
TGIF, 베니건스, 아웃백, 빕스가 당시의 4 대장이었다.
나는 그중에 TGIF와 아웃백을 특히 좋아했었다.
처음 갔던 패밀리 레스토랑의 기억은 TGIF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교차하는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문을 받았었다. 그 극진한 자세에 처음에는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직원이 떠나지 않고 메뉴를 정하는 과정을 보조하고, 지속적으로 나의 편의를 살피고 부족한 것을 찾아 챙겨주는 것도 불편하게 느꼈다. 한 마디로 꽤나 촌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패밀리 레스토랑이 주는 그 이국적인 분위기와 ‘미디엄 레어요’라고 말하며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 20살 초반 아이의 욕구는 비싼 가격에도 그곳을 찾게 만들었다. 온갖 할인카드와 통신사 멤버십을 긁어 최대한 할인을 받으면 종종 0원이라는 마법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아웃백은 부시맨브레드 때문에 특히 더 좋아했다. ‘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다녀왔어’를 뽐내고 싶은 어린 대학생에게 부시맨브레드는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당시의 아웃백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이 원하는 만큼 부시맨브레드를 주곤 했다.
“손님, 부시맨 브레드는 몇 개 챙겨드릴까요?”
“저희 3명 각각 3개씩 9개 주세요.”
3명이 식사를 해도 9개의 빵을 챙겨주는 인심이 있었고, 우리는 그 빵을 주변의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며, 나 아웃백 다녀왔어요를 뽐냈다. 아니 촌스럽고 어렸던 나만 뽐냈을지 모른다.
그날 우리는 스타필드의 아웃백으로 갔다. 메뉴판을 받고 주문을 하는 그 모든 과정이 반가웠다.
부시맨브레드를 받았고, 허니버터 소스가 나왔다. 나는 블루치즈 소스를 추가했다.
부시맨브레드는 겉이 살짝 거칠고 단단한 빵이다. 칼로 자르거나 손으로 찢어 먹곤 한다. 설탕이 제법 들어갔는지 아무 소스 없이 먹어도 씹다 보면 단맛이 올라온다. 하지만 소스를 찍어 먹어야 더 매력적인 빵이다. 기본적으로 나오는 허니버터에 찍으면 버터의 짠맛과 어우러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맛이 생긴다. 하지만 단맛이 좀 더 강해져서 나는 보통 블루치즈 소스에 먹는 것을 즐긴다. 치즈의 쿰쿰한 향과 고소함 그리고 짠맛이 순서대로 올라오는 맛이 좋다. 부시맨브레드의 달큼함이 어느 정도 잡히면서 묘하게 중독적인 맛이 된다.
이렇게 부시맨브레드에 집착하다 보면 메인디시가 나온다. 부시맨브레드를 추가로 시켜서 먹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허기가 면한 상태로 식사가 시작된다.
메인디시는 스테이크와 투움바 파스타였다. 스테이크는 뜨거운 철판 위에 담겨서 나왔다. ‘미디엄레어’로 주문된 스테이크의 겉은 바삭한 갈색을 보였다. 나이프를 이용하여 한 점을 자르니 부드럽게 잘라졌다. 겉은 갈색이었고, 속은 연분홍빛이었다. 겉바속촉! '미디엄레어'였다. 첫 한입이 너무 맛있었다. 입안 가득히 육즙이 퍼졌다. 바삭하면서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여운이 진했다.
살짝 느끼함이 느껴지면 투움바 파스타로 포크를 옮겼다. 크림과 고춧가루가 섞인 듯한 주황 빛깔의 소스 속으로 두껍고 탄력 있어 보이는 면이 보였다. 한 입 넣는 순간 매콤함, 진한 크림, 마늘 향이 동시에 입안에서 터졌다. 매콤한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스테이크의 느끼함을 씻어주었다.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번갈아 먹으며 잠깐의 행복에 젖어들었다.
“선생님? 힘드시죠?”
음식의 온기 위로 위로의 말이 더해졌다.
“미안해요. 1년 같이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병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부장님이랑 1년 계약이었는데, 계약파기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그런 말이에요. 사람 몸이 우선이죠.”
“그래도 미안하네요. 올해 많이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중간에 떠나야 하는 것은 나고 미안함에 밥을 사야 하는 것은 나인 것 같았는데, 미안해하지 말란 말을 들으면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내 병과 휴직에 관한 이야기는 짧게 오고 갔고, 그보다는 작년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짧은 대화와 따뜻한 식사 시간 속에서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고마웠다.
아파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이런 감정이 쉽게 올라온다.
이상하게 어릴 때는 잘 들지 않던 감정이 생겨난다.
이 따뜻한 한 끼가 잠시나마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잊게 해 주었다.
사람의 마음도, 몸도 결국은 따뜻한 온기로 버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