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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과 쓴맛 사이에서

선생님 목이 아파. 미안해.

by 수평선너머

9월 15일(월)은 수술날이다.

개학과 동시에 교무실에 수술 사실을 전했다. 타인에게 나의 아픔을 설명해야 함이 슬펐다.


방학 중에 여러 검사가 추가적으로 있었다. 세침검사 결과 임파선 전이가 확정되었다. 수술을 위해 약 7cm 정도 목에 선이 그어진다는 말을 듣자 그 길이가 이상하게도 크게 느껴졌다. 암세포가 성대 인근에 있고, 왼쪽 림프절 전이로 인해 곽청술을 시행한다고 했다. 의사는 곽청술을 ‘면도날로 긁어낸다”라고 표현했다. 그 말이 거슬렸다.


목소리 사용이 먹고사는데 중요한 직업이었고, 암세포가 성대 인근에 있어 목소리 변형 가능성이 있기에 음성검사도 추가로 받았다. 주변 갑상선암 환자 중에 음성검사를 받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검사를 위해 병원에 방문하는 것은 차치하고 비용이 30만원 가까이하는 점이 놀라웠다.


갑상선암과에서 이비인후과에 협진을 요청해서 이루어지는 음성검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수술 전 목소리와 성대 모양을 기록해서 수술 후 목소리가 이상해질 경우 비교 분석을 통해 치료의 방향성을 잡는다.


멀쩡한 상태의 내 성대를 기록하기 위해 후두내시경을 했다. 이제 살다 살다 목구멍까지 내시경을 받는구나 싶었다. 내시경을 빼자 콧물이 주르륵 흘렀다.


몇 가지 설문지를 작성하고는 컴퓨터 음성 기록이 이루어졌다. 컴퓨터와 마이크가 있는 진료실에 들어가 의료인 1명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가을 풍경이 1장 가득 서술된 A4용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앞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어주세요.”


지시에 따라 마이크 앞에서 가을의 아름다움을 또박또박 읽었다. 뒤이어 높은 소리, 낮은 소리, 도레미파솔라시도 높게, 낮게 등등 온갖 나의 소리가 컴퓨터에 저장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따라 하면서 시범을 보이는 의료인의 음감이었다.


‘음 장난 아닌데? 절대음감인가? 아카펠라 동호회 활동하시나?’

차마 노래 잘하시나요를 묻지 못한 상태로 내 목소리 기록은 끝이 났고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추가 검사로 얼룩진 방학이 종료된 상태로 2학기를 살짝 진행하다가 수술 날짜가 다가온 것이다. 수술을 앞둔 직전주의 목요일 1교시 난 교탁에 서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음. 안녕 얘들아? 너네 담임이다. 아. 어떡하냐. 왜 이렇게 걱정이 앞서지?”


요즘 남학생들과 사이가 안 좋아진 여학생이 한 명 있다. 사춘기가 2학기에 온 것인지 1학기때만 해도 세상 밝음을 뽐내던 아이가 2학기에는 내내 어두운 기운을 풍기고 있다.


1학기 내내 싸우던 남학생과 여학생은 어제도 맞붙었고 개인적으로 6명을 내리 상담하다 2명이 엉엉 울길래 이봐 울고 싶은 건 나라고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던 기억도 솟는다.


며칠 전엔 아이들 일로 교장, 상담 선생님 그리고 전담 경찰관까지 모여 회의를 했다. 회의를 하면서도 다음 주로 닥친 수술이 잊히지 않았다.


“음.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음 너네 선생님 아파. 목이 아파. 목에 안 좋은 혹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해. 수술 자체는 간단하고 회복도 빠른데 문제는 수술하면 목소리가 잘 안 나온대. 나와도 모기소리만큼 작게 나오고 1시간 이상 말을 하면 목소리가 잠기고 피곤하다네.”


“에에? 선생님? 무슨 말이에요? 아프다고요?”


“오늘이 목요일이지? 나 내일까지만 학교 나오고 병원에 입원해. 다음 주에 수술하고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할 거고 말 안 하면서 3개월 정도 쉬어야 해. 그래도 3개월 쉬는 동안 너희들 대신 수업해 주실 선생님은 구해졌어. 나 12월 초에 돌아올 거야. 그래도 1달 너네랑 수업하고 졸업시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


“선생님? 안 돼요! 우리가 말 잘 들을게요. 선생님 목소리 안 나오시면 컴퓨터에 글로 써서 하시면 안 돼요? 말 안 나오게 저희가 엄청 조용히 있을게요.”


“난 너 한 명은 믿는데 우리 반 25명은 좀처럼 조용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내 몸도 걱정인데 너네 걱정도 한 가득이다. 선생님은…”


“3월 달에 선생님이 이야기한 거 기억하니? 6학년은 초등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1년이라고 이야기했었잖아. 선생님이랑 추억 쌓을 생각 말고 주변 친구들과 추억 많이 쌓으라고. 어차피 졸업하면 나보다는 너네 옆의 친구들 볼 거라고 했던 거 말이야.


여름방학 1달도 금방 지나갔지? 선생님 없는 3달도 금방 지나갈 거야. 어차피 너네 중학교 가면 과목별로 선생님 만나게 되니까 너무 한 선생님한테만 집착하지 마.


3개월 대신해줄 선생님도 좋으신 분이야.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있어. 공부하기 싫으면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난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가?”


마지막까지 꼰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고, 가슴이 아렸다. 그날 하루는 1번부터 25번까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내가 느꼈던 아이들의 좋은 점과 고치려고 노력할 점을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끝났던 거 같다.


생각보다 타인에게 나의 장점과 단점을 들을 기회는 흔치 않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아가면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퀴즈에 나왔던 초등학생들이 있다. 그들에게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를 묻는 장면이 있다. 학생들은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쁘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그렇다. 이처럼 기분 나쁜 것은 학교에 다닐 때만 선생님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훈육은 끝이 난다. 누군가의 조언을 듣기란 굉장히 희박해진다.


아이들은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고, 나는 손 편지 내지는 손으로 만든 것만 가능하다와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목요일을 마무리지었다. 아쉬운 마음의 아이들은 금요일 내 말을 절반 정도만 듣고 손편지와 손으로 만든 꽃다발 그리고 엄청난 양의 목캔디 시리즈를 선물해 주었다.


내 흔적을 말끔히 정리한 교실을 떠나려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초록색 칠판 위로 태극기가 걸려 있고, 한쪽 벽엔 행사표와 급식표, 주간학습안내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교탁과 아이들의 의자와 책상까지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하루의 절반을 보냈던 이 공간이 삶에서 잠시 멀어진다. 아이들의 웃음과 땀냄새가 섞인 공기가 천천히 식어갔다. 문을 닫고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을이 오는 냄새가 났다.


주말 동안 아이들의 편지와 간식을 정리했다. 병원에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선별하고 집에 남겨둘 것들을 골랐다. 학교 선생님들이 주셨던 선물 가운데 오레오 과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오레오를 좋아한다. 까만 쿠키 사이에 부드럽게 끼워진 흰 크림의 조화를 사랑한다. 어느 날 오레오 때문에 아내와 여행 가서 다투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기억에 남으셨나 보다. 오레오 선물이라니, 선생님의 마음이 고마웠다.


어느 날 해외에서 크림의 양이 두 배인 ‘더블 오레오’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언제 출시되나 기다렸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고, 몇 년 뒤에 미국 여행 중에야 그 오레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트를 좋아하는 나는 여행을 가면 꼭 마트를 들렸다. 미국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타켓’, ‘트레이더 조’, ‘H마트’를 이어 ‘월마트’에 갔었을 때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더블 오레오’를 만날 수 있었다. 옆에는 ‘메가 오레오’라는 신제품까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를 말려줄 아내는 집에서 쉬고 있던 어느날의 하루였다.


“또 언제 미국에 오겠어? 맛 비교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지.”


결국 두 상자를 모두 집어 들었다. 문제는 월마트가 대용량의 과자만 판다는 거였다. 한참의 고민이 이어졌고, 양손에 패밀리사이즈를 두 상자나 들고 계산대를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더블 오레오’와 ‘메가 오레오’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크림이 많아 한 입 베어 물면 부드러움이 입안 가득 퍼졌다. 씁쓸한 쿠키의 맛이 지워질 정도였다. ‘메가 오레오’는 2-3개 먹으면 물렸고,’ 더블 오레오’는 4-5개쯤 먹어야 물렸다.


뭐 이렇게 오레오만 잔뜩 사 왔냐는 아내와 다툼이 있었고, “다 먹을 수 있으니까 산 거야’라는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늘어놨다. 그리고 정말로 꾸역꾸역 두 상자를 다 먹었다. 그게 2년 전의 일이었고, 그 뒤로 오랜만에 오레오를 만난 것 같다.


‘마이쮸는 내려놓고, 무가당 캔디는 챙겨 넣고, 하루 견과류는 챙겨도 되겠지? 아. 오레오는 어쩌지? 혹시 모르니까 두 봉지만 챙겨야겠다.’


짐을 어느 정도 챙기고 나니 책상 한 곁에 아이들의 편지가 보였다. 몇 개를 꺼내 읽어보았다.


"슬프긴 하지만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잘 기다리고 있을게요."


"쌤, 건강 문제로 학교를 세 달간 안 오신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어요. 언제나 교실을 따뜻한 미소로 채워 주시던 선생님이 안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실이 조금은 텅 빈 듯 느껴집니다… 건강하게 돌아오세요."


"3개월 동안 새로운 선생님과 공부하고 적응돼서 문제 안 일어나게 하고, 아이들과도 싸움 안 나게 노력해 볼게요."


읽는 동안 이상하게 목이 간질거렸다. 오레오 한 조각을 꺼내 베어 물었다.


크림의 단맛이 먼저 번지고, 곧 쿠키의 씁쓸함이 밀려왔다. 크림만 먹을 때보다, 그 씁쓸함이 섞일 때 단 맛은 더 깊어졌다.


‘그래, 너무 단 맛만 있는 것도 좋지 않잖아. 적당히 씁쓸한 게 있어야 맛이 깊잖아. 지금의 멈춤도 잠깐의 쓴맛일 거야. 지나고 나면 내 인생도 좀 더 깊어지겠지?


남은 오레오를 입안에 털어 넣고, 조용히 씹어 삼켰다. 달고 쓴 맛이 함께 어우러져 오랫동안 입안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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