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떨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대학병원을 가게 되었다. 새삼 암이라는 글자가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나는 원래 7월 4일로 잡혀있던 진료를, 취소 자리를 여러 차례 문의한 끝에 4월 18일로 당길 수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8시 30분이 진료 예약 시간이었지만, 출근길 교통이 막힐까 염려돼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다행히 도로는 한산했고, 병원에 도착하니 시계는 7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병원은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듯 고요했고, 텅 빈 로비 한쪽에서 몇 대의 키오스크만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신분증, 조직 슬라이드, 약 처방전, 진료의뢰서까지 챙겨야 할 것들을 다시 가방에서 꺼내 확인했다. 은전 한 닢 마냥 한 푼 한 푼 모은 돈을 바꾸듯이, 하나하나 자료들을 모아 대학병원 출입증을 만든 것 같았다. 그 뭐 소중한 거라고 혹시나 잊은 거 없나 혼자서 텅 빈 로비 의자에 앉아 챙기는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헛헛한 마음을 뒤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건물 외관과 달리 반짝이는 로비의 바닥은 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검진병원에서 작성해 준 진료의뢰서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알기 힘든 의학용어의 홍수 끝 말미에 알 수 있는 문장이 하나 겨우 보인다. <상기 진단으로 전원 하오니 고진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갑상선암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어떤 고명한 진찰이 가능할까?
갑상선암 수술은 목 중앙에 위치한 나비 모양의 내분비기관 다시 말해 갑상선을 제거하는 수술이다. 갑상선암은 착한 암 혹은 진행이 느려 거북이 암이라고도 불린다. 다른 암에 비해 그 진행이 더디고, 1cm 이하 작은 갑상선암의 경우 10년을 내버려 두어도 상태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논문도 있다. 내 결절은 0.6cm와 0.5cm로 작은 편이다. 그냥 수술 없이 내버려 둔 상태로 매년 추적관찰만 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아주 작은 크기다. 실제로 미국, 캐나다 등의 북미나 일본의 경우 갑상선에 암조직이 발견되어도 크기가 작은 경우, 바로 수술보다는 정기적인 초음파검사를 통해 크기의 변화나 진행양상을 살펴보는 진료 형태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갑상선 암의 크기에 상관없이 유독 갑상선 수술 건수가 많아 ‘과잉진단이니 과잉치료’라는 말도 인터넷에 자주 보인다. 암 조직을 몸 안에 품고 사는 게 불안할 수도 있지만 갑상선암 수술을 하게 되면 평생 갑상선호르몬약을 먹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생겨난다. 기상하면 매일 약을 1알 먹어야 하고 공복을 1시간 유지해야 한다는데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시간은 흘러 진료시간이 다가왔다. 의사와 간단한 문진이 있었고, 간호사에게 준비해 온 자료들을 건넸다. 여러 가지 검사 안내를 받았고, 검사 후 오후 2시 30분에 다시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1. 진료실을 나와 혈액검사를 위해 피를 뽑았다.
2. 키와 몸무게 그리고 혈압을 측정했고,
3. 갑상선 초음파 검사를 다시 받았으며,
4. 흉부 엑스레이를 찍었다.
5. MRI 검사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영제를 주사받게 되었다.
6. 간호사가 내 혈관을 찾지 못해 5번이나 주사 바늘을 찔렀다. MRI 검사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점심은 병원 내 식당에서 일식 돈까스를 먹었다. 사실 원래 오늘은 오전에 진료를 끝내고 점심은 먹고 싶은 돈까스 집을 가려고 했었다.
남자의 소울푸드 3대장으로 흔히 돈까스, 제육볶음, 국밥이 꼽힌다. 하지만 나에게는 돈까스만이 소울푸드라 부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사실 나는 돼지고기 냄새에 예민하다. 예민하다기보다, 유전자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주로 거세하지 않은 수퇘지 고기에서 나는 냄새를 민감하게 느낀다고 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100% 거세된 돼지고기만 유통되기에 요즘 친구들은 유전자를 떠나 돼지고기 냄새를 예민하게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은 돼지고기도 종종 유통이 되었고, 삶거나 볶는 방식의 조리 방법을 택한 돼지고기 요리들은 나에게 힘든 종목이었다.
그런데 돈까스만은 달랐다. 얇게 두드려 튀긴 고기와 달콤하고 진한 소스가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를 완전히 가려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돼지고기 요리의 유일한 예외이자 유일한 소울푸드는 돈까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수요일 급식 메뉴표에 돈까스와 크림수프가 보이면, 나는 월요일부터 설렘에 들떠 있게 된다. 돈까스는 단순한 메뉴가 아니라 그 주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만드는 작은 동력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암 확정과 수술 계획, 그리고 이어질 진료를 앞두고 나는 두려웠다. 병원에 가는 일이 몹시 싫었고, 강남 세브란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미리 싫어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병원을 처음부터 나쁜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음식은 돈까스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경양식 돈까스였다.
1년 정도 한국을 떠나게 될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삶을 정리하며 약 한 달 정도 전주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전주는 콩나물 국밥과 비빔밥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어떤 집에 들어가도 평균 이상의 음식맛을 내는 곳이다. 그러기에 한국을 떠나기 전 가장 그리울 것 같은 음식으로 무엇을 고르든 실망시키지 않을 음식점이 즐비해있었지만, 나는 수많은 선택지를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으로 경양식 돈까스를 골랐다.
내가 원하는 돈까스집의 조건은 단순했다.
1. 식전 수프가 나올 것
2. 돈까스 소스는 되직하니 진하고 달콤한 느낌으로 접시 위를 가득 채울 것.
하지만 낯선 동네에서 그런 집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전주 고유의 특색 있는 경양식집을 원했지만 검색 끝에 찾았던 집은 전국 체인점인 엠브로돈까스였다.
전주 신시가지의 새로 조성된 건물에 자리한 가게는 간판도 내부도 깔끔했다. 키오스크 주문, 오픈 주방, 젊은 사장님. 오래된 노포라기보다 이제 막 시작한 ‘청년 가게’ 같은 느낌이었다.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을 뒤로하고 메뉴를 고르고 기다렸다.
내 선택은 엠브로 경양 왕돈까스였다. 12,500원이었는데, 커다란 크기의 돈까스를 2장이나 주는 것을 생각하면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수프와 밥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나온 수프를 한 숟갈 뜨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시중에 파는 오뚜기 수프 맛이었다. 집에서 루를 만들어 수프를 끓여본 적도 많지만 이상하게 가끔은 이 단순한 시판 수프가 그리웠다. 어린 시절 누나와 끓여 먹고는 했던 내게는 추억 같은 맛이었다.
함께 나온 돈까스로 시선을 옮겼다. 접시가 넘칠 만큼 얇고 큰 크기로 튀겨진 고기, 그 위에 부어진 브라운소스는 되직한 질감과 달큼한 맛이 내가 딱 원하던 스타일이었다. 버터에 볶은 양파와 밀가루 루, 케첩과 우스터소스로 만든 전형적인 경양식 데미글라스 풍의 소스였다. 소스는 달지만 짜지 않았고, 은근한 산미가 단짠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돈까스는 소스에 젖어 있으면서도 바삭함을 잃지 않았다. 씹을수록 고기의 담백함과 소스의 달짝지근함이 함께 어우러졌다. 왕돈까스는 일반적인 1인분 돈까스 2장 분량이었고, 나는 밥을 세 번이나 리필한 끝에 그릇을 말끔히 비울 수 있었다.
나는 그 만족감에 한국을 떠나기 전, 약간의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한 번 더 엠브로돈까스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간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그리웠던 음식은 다름 아닌 그곳의 경양식 돈까스였다. 한인식당에서 파는 돈까스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맛이었다.
엠브로 돈까스는 경기도 남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체인점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고, 수원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은 군포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 병원 진료를 마치고 점심으로 엠브로돈까스를 먹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진료와 검사는 생각보다 많았고, 결국 점심은 병원 내부 식당에서 해결해야 했다.
병원 내 식당의 메뉴는 고속도로 휴게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경양식 돈까스가 아닌 일식 돈까스를 판매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것을 주문했다. 맛은 무난했고, 가격도 적당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족감은 아니었다. 그렇게 적당한 맛에 적당히 만족한 채 오후 진료를 기다렸다.
오후 2시 30분, 오전에 만났던 의사와 다시 마주 앉았다. 대학병원의 빠른 검사 처리 속도는 오전에 진행한 모든 검사의 결과를 의사의 컴퓨터 화면에 띄우고 있었다.
“갑상선 암이 맞아요. 크기는 작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양쪽 다 수술이 필요해 보이네요. 갑상선을 전부 제거하는 전절제 수술이 필요해 보입니다.”
짧은 대화 끝에 내려진 결론은 명확했다. 수술은 불가피해 보였다. 수술 코디네이터와 일정을 논의했고, 가장 빠르게 수술이 가능한 일자는 6월 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수술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어려웠다. 결국 수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다른 병원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실제로 환자들 사이에서는 병원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말이 돈다. 서울대병원은 보존적 치료를 앞세운 관찰을, 세브란스는 적극적인 수술을 권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밖에도 병원이나 교수들마다 치료나 처치하는 방법의 색이 달랐다. 지인의 경우 갑상선 암을 발견하고 여러 대학병원을 다녔고, 대부분 전절제 수술을 권유받았었다. 당시 지인이 방문했던 수많은 병원 중 단국대병원만이 반절제 수술을 제안했고, 그곳에서 수술을 받은 지인은 현재 갑상선호르몬약 복용 없이 살아가고 있다.
모든 치료에는 장단이 있었다. 보존적 치료는 수술 흉터나 약복용에서 자유롭지만, 몸 안에 암세포를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불안이 따른다. 수술적 치료는 암을 없앤다는 안도감이 있지만,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하고 목소리 변형이나 흉터를 감수해야 한다.
나는 당장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번 연도 6학년 담임교사를 맡으면서 학생들을 온연하게 졸업시키고 싶은 마음도 컸다. 매일 아침 약을 먹으며 사는 삶도, 수술로 목소리가 변하는 일도 두려웠다.
결국, 그날 나는 수술 일정을 미뤘다. 마음속에서 먹기로 결심했던 엠브로 돈까스도 함께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