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암을 진단받은 날도 출근은 하고 밥은 먹어야지.
출근을 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 수업을 종료했다.
내 직업은 교사이며, 이번 해 6학년 담임교사를 맡았다.
3월을 앞두고 학생들만 교사와의 만남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도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이제는 제법 나이가 들어버린 나를 좋아해 줄까 등등을
걱정하며 3월을 준비한다.
6학년 담임을 맡는 해는 특히 더 복잡한 감정이 든다.
새 학기 첫날, 아이들을 만나면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희와 내가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1년 생활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남자 담임이라는 게 반가운 친구도 있고, 걱정되거나 싫은 친구도 있겠지? 선생님이 어떤지 걱정하지 말고 주변을 한 번 둘러봐. 선생님보다는 주변 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할걸? 6학년은 그 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기억에 남을 시기야.
선생님은 너희들이 1년 동안 친구들과 많은 추억 쌓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졸업하고 나면 선생님보다는 아마 친구들이 더 생각날 테니까. 나랑은 잘 맞는 친구도 잘 맞지 않는 친구도 있을 거야. 혹시 잘 안 맞는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너네 담임이 돼버린걸 말이야.
나는 일 년 동안 너희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거야. 아무 조건이나 이유 없이 말이야.
오늘 나는 2반 담임교사가 되었고 너네는 2반 학생이 되었어. 그 이유 하나 만으로 너네가 잘못을 하는가 칭찬받을 일을 하는가와 상관없이 너네를 사랑할 거야. 아. 사랑하려고 노력할 거야. 처음 만났는데 오늘부터 사랑하기는 아무래도 어렵잖아. 선생님이 금사빠는 아니거든(웃음). 느끼하다고? 뭐 여하튼 우리는 오늘 이렇게 만나서 같은 반이 되어버린 걸 어떡해? 받아들여!! 1년 동안 잘 부탁한다.”
그런데 반 아이들을 만난 지 이제 겨우 2주가 돼 가는 무렵에, 1년 동안 잘 부탁한다는 말이 허공에 맴도는 공수표가 되지 않을까를 염려하며 갑상선 2차 검사의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간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겨 차에 몸을 실었다. 병원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운전을 하는 시간 내내 마음은 불안으로 흔들렸고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방학 기간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았고 결과를 확인하던 중 갑상선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정확히 내 결과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갑상선초음파 결과 [갑상선결절/갑상선암의증] 소견으로 2차 추가검사를 요합니다.>
통계를 내는 기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2차 추가검사자 중에 20% 내외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2차 추가검사는 세침흡입검사로 기다란 바늘을 목에다가 꽂아 종양의 일부를 채취한다. 내 경우 왼쪽 갑상선에 0.6cm, 오른쪽 갑상선에 0.5cm의 결절이 발견되어 2방의 바늘을 목에 맞았는데 검사하는 의사의 표정과 말이 내내 찝찝하기는 했다.
“세로가 더 긴데… 이거 안 좋은 모양인데.”
당시에는 애써 무시했지만 의사가 나에게 갑상선암을 예견하는 약간의 힌트를 주지 않았나 생각해 보지만 부질은 없다.
30여분의 운전을 거쳐 내가 차를 멈춘 곳은 한국건강관리협회 수원지부였다. 지난번 대장의 용종으로 맛보기를 실패했던 중국집이 있는 곳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먹을 것 생각이라니 잠시 중국집에 대한 미련이 생겼지만 일단 검사 결과를 듣는 것이 먼저였다.
“네, 갑상선 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때도 모양이 안 좋아서 의심하기는 했지만 양측 모두 5단계네요. 1층 내려가시면 수술이 가능한 병원과 연계 도와주실 거예요.”
정신이 멍해졌다.
암이라니...
암이라고?
그래, 암이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정신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
세침흡입검사 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갑상선암에 대해서 수없이 검색을 했다. 진행이 느려 '거북이암' 혹은 '착한 암'이라 불리고 예후도 좋다는 글들을 읽었다. 그런 말들만 마음속에 남기며 '혹시 암이어도 괜찮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막상 '암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니 먹먹해졌다.
전이나 재발 사례 등, 일부러 외면했던 부정적인 글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래도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 고칠 수 있는 병이야. 내 주변에도 3명이나 있지 않은가?
난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들은 본인이 수술을 받은 서울대, 세브란스, 단국대 등 각종 대학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고심이라기보다는 카페에서 메뉴 고르듯이 그냥 강남 세브란스 병원을 선택했고, 병원에서는 7월 4일 금요일 8시 30분으로 진료를 예약해 주었다.
4개월이나 기다려야 하나? 아니. 그 정도 기다려도 된다는 거면 그렇게 급하지는 않나 보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은 끝났고, 곧 저녁이네. 저녁은 뭘 먹어야 하지?
생각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로 아내에게 담담하게 현재의 내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는 저녁 메뉴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간짜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단을 들은 병원 근처에는 꽤 유명한 중국집이 있다. 수원에서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길림성이라는 곳이다. 입구의 간판부터 오래된 맛집의 아우라를 풍겼고, 안으로 들어서면 일회용 비닐 대신 정갈하게 다려진 하얀 천 테이블보가 깔려있는 식탁과 고풍스러운 의자가 손님을 반겨준다. 유린기나 팔보채 같은 요리가 어울릴법한 분위기였지만 내 선택은 언제나 간짜장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간짜장을 먹었을 때다. 소스와 면이 다른 그릇에 담겨 나오는 형태가 생소했다. 잘 섞이지 않는 뻑뻑함을 이기고 비벼서 한입을 먹었을 때 진하게 풍기는 불맛과 양파의 아삭한 식감이 꽤나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중국집에 갈 때면 십수 년째 간짜장만 주문하고 있다.
보통 짜장면은 미리 만들어 둔 짜장소스를 데워 면 위에 부어서 나온다. 하지만 간짜장은 다르다. 주문이 들어간 뒤에야 조리가 시작된다. 기름을 두른 중식웍이 화력이 강한 불 위에 얹어진다. 그 위로 양파와 돼지고기가 볶아진다. 강렬한 웍질을 토대로 생성된 불맛이 재료에 스며들 때쯤 볶은 춘장을 넣고 웍질을 반복하면 완성이다.
갓 만들어진 짜장 소스는 면과는 다른 그릇에 담겨 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짜장은 첫 젓가락을 넣는 순간부터 다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진한 불맛, 끝까지 살아있는 양파의 식감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뻑뻑해서 일반 짜장면과 달리 침과 섞여 물이 생기지 않는 깔끔한 뒤처리까지 나는 좋았다.
요즘은 진짜 간짜장을 내는 집을 찾기가 어렵다. 중식웍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주방장이 필요하고, 주문 즉시 만들어야 해서 손도 많이 간다. 배달로 오는 간짜장은 대개 면과 소스를 따로 담아서 주는 형태로 간짜장의 모양새를 흉내만 낼뿐이었다. 그 안에 웍의 열기와 순식간에 입혀지는 불맛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길림성의 간짜장은 달랐다. 오랜만에 만난 진짜 간짜장이었다. 뻑뻑할 만큼 묵직한 소스와 면을 섞어 먹으며, 나는 어느새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간짜장의 그 강렬한 불맛에 나는 내 진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암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길고 무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