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입원을 했고, 지금은 다른 월요일이다.
연초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다. 만 40세를 맞이하여 제법 비용을 들여 다양한 검사를 추가해서 받았다. 개중에는 위내시경처럼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검사도 있었고, 초음파 검사처럼 낯선 검사들도 있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를 묻는다면 사람들마다 대답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건강검진에서의 힘듦은 대장내시경과 관련이 깊다. 누군가는 전날 약 복용을 위해 마셔야 하는 2리터의 물이 힘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속을 비워야 하는 그 과정이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2개 모두 아니었다. 난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서 검사 3일 전부터 관리해야 하는 식단이 가장 힘들었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서는 3일 전부터 잡곡밥, 씨 있는 과일, 해조류, 기름진 음식, 튀김류를 피해야 한다. 전날에는 흰 죽이나 카스텔라만을 먹으며 심지어 오후 6시 이후에는 금식을 유지해야 한다. 검사를 위한 준비 기간에 흰쌀밥, 계란, 두부 등의 밍밍한 식단을 유지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밖에서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섭취해야 하는 장소에 가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로 준비한 밍밍한 카스텔라 빵을 먹으면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무화과잼빵 따위에 식탐이 생기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가 보다. 3일은 내가 먹는 음식들이 이리 자극적인 게 많았나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것들보다 더한 식단으로 일주일 넘게 먹게 될 줄은 말이다.
검사 당일에는 검사가 끝나고 난 뒤 기름진 짜장면으로 위장을 코팅할 생각에 설렘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록 대장에서 발견된 용종 1개로 며칠간은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라는 의사 때문에 중국집 방문은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난 입 안의 행복이 삶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새벽부터 달려간 건강검진병동은 커다란 공장 같았다. 똑같은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똑같은 의료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 서서 똑같은 질문을 받고 검사를 받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라는 것을 신분증을 통해 증명하기 위해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고 있다. 가성비 좋은 검사비 때문에 찾아서 온 병원인데 박리를 위한 다매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오늘 받아야 하는 검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방문 장소들의 순서와 방법이 적힌 안내판을 받는다. 어떤 검사는 지하 1층, 어떤 검사는 2층 혹은 4층 등 신청한 검사에 따라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이리저리 검사를 찾아 방황하다 보면 드디어 검사의 대미 위대장 내시경이 나를 기다린다.
수면 내시경은 처음이었다.
20대 시절, 힘들었던 나를 달래주었던 것은 늘 똑같았다. 파닭 반 마리, 불닭볶음면 1개, 파인트 아이스크림, 그리고 맥주. 그것은 지금으로 치면 소확행을 위한 나만의 의식이었다.
매주 금요일 퇴근길이면 같은 경로를 돈다. 편의점에서 불닭볶음면과 페트병 맥주를 고르고, 가까운 거리의 치킨집에 들러 순살 파닭 반마리를 포장주문해 둔다. 치킨이 준비되는 동안 배스킨라빈스 매장으로 향한다. 엄마는 외계인, 뉴욕 치즈케이크 그리고 자모카 아몬드 훠지까지 내 취향은 항상 같았고,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시 치킨집에 가면 파닭이 나와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맥주는 바로 냉동고로 향했다. 내겐 차가움이 중요했다. 맥주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져야 비로소 힘듦을 내려보낼 수 있었다. 불닭볶음면은 조리법대로 만들지 않았다. 물을 조금 더 남겨 자작하게 끓이는 것이 포인트였다. 국물에 양념이 더 잘 섞이고, 덜 맵고, 먹는 내내 마르지 않게 유지할 수 있어서였다. 그 사이 차가운 컵을 꺼내고, 냉동고의 맥주를 꺼내 따른다. 남은 맥주는 다시 냉동실로 보낸다. 맥주가 빌 때마다 냉동고를 열고 닫는 반복은 번거롭지만, 차가움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다.
식사는 단순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불닭볶음면, 고소한 파닭 몇 조각,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맥주. 조금씩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불맛과 탄산이 지친 하루를 씻어낸다. 면을 다 먹고 국물만 남으면 레인지에 1분 30초 돌린 햇반 한 개를 그 안에 털어 넣고 볶는다. 불을 세게 했다가 중불로 줄이며 참기름 한 방울, 맛소금 조금, 그리고 조미김은 손으로 부숴 넣는다. 불닭볶음면의 기름이 밥에 배어들고 누룽지가 살짝 생기면 완성이다.
고소한 냄새가 자취방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쯤이면 식사를 하며 재생한 영화는 중반쯤 진행 중이다. 주로 쏘우 시리즈 같은 공포물이나 좀비 영화를 보았다. 현실을 벗어난 잔인하거나 기괴한 상상들이 자취방 모니터에서 돌아가고 있지만 나는 따뜻하고 고소운 볶음밥 한 숟가락, 그리고 맥주의 마지막 잔에 집중한다. 모든 감각이 하나의 리듬처럼 이어지다가, 마지막은 차가운 파인트 아이스크림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달콤하고 시원한 그것이 맵고 짠 음식으로 고장 난 위장을 조용히 달랜다. 아이스크림통이 바닥을 보일 무렵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올라가고 나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사람이 죽고, 도망치고, 절규하던 가짜 세계가 끝나있다. 고요한 자취방의 정적 속에서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 여기가 현실이지.’ 사람이 죽고 죽이는 세계가 아닌, 살아 있는 나의 공간. 그렇게 새벽 늦게, 멍하니 불 꺼진 자취방 천장을 보다가 잠에 들곤 했다.
1년 넘게 반복된 그런 생활은 결국 내 대장을 망가뜨렸고, 나는 30대를 시작하며 대장내시경을 받게 되었다. 그 시절의 내가 선택한 방식은 비수면이었다. ‘뭐 얼마나 아프겠어.’ 오만한 태도로 견딘 그 기억은 꽤 괴로웠고, 그게 이번 수면내시경을 신청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4층 검사실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수면 내시경을 신청했는데 수면이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생애최초 수면 내시경을 신청한 모든 사람들이 하는 걱정을 하는 동안 내 차례가 왔고, 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모든 검사는 완료되어 있었다. 얼얼한 입천장만이 내 위와 대장에 어떤 기구가 들어갔다 나왔나 보다를 알려주고 있었다.
2주 뒤에 나온 결과지는 콜레스테롤, 당화 혈색소 주의 등 흔한 40대의 몸 상태를 알려주었다. 많은 것들이 문제였지만 식생활이나 생활습관 개선등으로 해결의 기미가 보였고, 그것보다는 갑상선 초음파 검사 발견된 결절이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결절의 모양이 좋지 않다 하였고 결절의 세침검사를 권했다. 아 또 그 공장 같은 장소에 또 가야 하나라는 귀찮은 감정만이 떠오를 뿐이었고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갑상선암에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