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임브레이스embrace>
몸에 대한 이야기는 지겹지만 언제나 새롭다. 그러나 대부분 다시 지겨운 결론으로 도착하고 만다. 이 영화도 그랬다. 먼저 스스로 내 몸을 사랑하자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임브레이스>는 처음엔 신선했지만 점차 지겨워지더니 마지막엔 진부해진 다큐멘터리다.
타런 브럼핏은 임신과 출산 후 ‘망가진’ 몸을 복구하려 한다. 그는 치열한 식단 조절과 운동 끝에 보디빌딩 대회에 나갈 정도로 ‘완벽한’ 몸을 ‘가진다’. 그러나 백스테이지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더이상 무리하게 몸을 유지하지 않기로 한다. 뭇 여성이 부러워할 만한 몸을 가진 이들도 말했다. 여기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어, 저기가 좀 없었으면 좋겠어. 무대 위의 여성들조차 몸에 만족하지 못한다. ‘완벽한’ 몸을 가져봤자 몸에 대한 강박과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녀의 몸은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수술을 고민한다. 그러나 딸에게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줄지 그녀는 우려한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까.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까. 마치 자신처럼.
브럼핏은 9주 동안 몸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가진, 다양한 몸의 여성을 만난다. 잡지에 ‘L사이즈 여성’을 모델로 쓴 편집장, <헤어스프레이>에서 ‘뚱녀’ 캐릭터로 사랑받은 배우, 거식증을 겪은 여성, 한쪽 얼굴이 마비된 여성, 수염난 여성, 장애 여성 등.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 세상은 마치 한 타입의 여성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비정상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완벽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잡지 속 모델의 모습조차 보정된 것이며, 그들 역시 평생을 그 몸으로 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많은 여성은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스스로를 고문하며 성취감을 느낀다.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굴레에 몸을 던진다. 거식증 옹호 사이트에는 ‘thinspiration’, 즉 다이어트 자극 사진이 가득하다. 영화는 다이어트가 오히려 몸을 망친다는 점을 알린다.
초반에는 서로 붙지 않는 허벅지, 적절한 유두의 위치, 성기 성형 수술까지 여성에게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듯했다. 그러나 영화는 엉뚱한 함정에 빠진다. 수염이 난 SNS 스타, ‘빅사이즈’ 모델 등 인터뷰이는 말한다.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요!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달렸어요!” 여성들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애초에 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만든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개인은 달라지기 어렵다.
영화는 나이브하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주문을 부정하겠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은 결코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조금이라도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몸을 긍정하려면 몸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지 어렵다. 그걸 개인 차원으로 돌려선 안 된다.
록산 게이의 <헝거>는 이런 점을 잘 지적한다. 저자는 담론을 선도하는 페미니스트이지만 자신도 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치열하게 고백한다.
“나도 간절히 쓰고 싶다. 다이어트 성공 후기와 함께 내 안의 악마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물리쳤는지 마음껏 자랑하는 책을. 아니면 내 몸의 크기가 어떠하건 간에 내 몸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담담히 고백하는 책을.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을 쓰지 못하고 대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
(…) 실은 지금도 계속 그러한 결단력과 의지력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 몸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 몸이 견뎌온 그 모든 것, 내 몸이 되어온 것 이상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그 다짐이라는 녀석은 나를 그리 멀리 데리고 가지 못한다.”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이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몸이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 역시 부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이 몸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도망갈 수 있는지도 몰랐고 이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 극도로 두려웠던 건 역시 나의 외모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나를 손가락질할까 봐, 내 몸무게를 비웃을까 봐 두려웠고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었고 언제나 그래왔다.”
한국은 어떤가. 미디어를 보자. 한편에서는 ‘과하게 많이 먹는’ 먹방이 유행 중이며, 다른 편에서는 몸매 품평과 과시가 일상적이다. 기형적이다. 먹방 영상마다 꼭 달리는 댓글이 있다.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ㅠㅠ” 현실에서 그들처럼 먹으면서 그들의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다. 일반 사람들이 먹고 후회하는 사이 다이어트 산업을 활개를 친다.
모두의 몸은 다르다. 더 건강하거나 강해질 수는 있지만 달라질 수는 없다. 달라질 필요도 없다. 그러니 몸에 대한 정상성을 해체해야 한다. 몸을 과할 정도로 의식하게 만드는, 몸에 대한 강박을 자극하는 미디어와 사회를 비판했어야 한다. 다큐멘터리의 방향이 개인의 의식 수준으로 축소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모든 여성은 여전히 거울 앞에서 자신의 배를 쓰다듬어보고 팔뚝을 꼬집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에서 좋았던 말은 우리의 몸은 vehicle이자 영원한 동반자라는 것이다. 결국 친구처럼 잘 돌봐야 한다.
https://www.netflix.com/title/80162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