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을 보고
4:3 비율의 화면은 <마미> 이후로 처음이다. <마미>는 주인공의 인식이 확장되면서 확 화면이 16:9로 넓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쾌감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4:3 비율이다. 게다가 사울 얼굴을 엄청 크게 비추고 그 외 다른 장면들은 아웃 포커스한다. 답답하다.
김일란 감독은 강렬한 실험이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 거기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 그러고 보면 그 흐릿함이, 그리고 상대방의 표정을 주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방식을 영화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은 결국 나의 고통과 같아질 수는 없다. 내가 느끼는 3차원(가끔은 4차원인 것 같기도 하지만)의 고통은 남에게 전달되면 작고 하찮은 2차원의, 그것도 흐릿한 무엇이 되니까. 그리고 그 상황보단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가 더 잘 느껴지니까.
포커스 아웃의 또 다른 효과. 근시안적이다. 사울은 이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않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사울은 ‘존더코만도’다. 유대인이지만 몇 달 더 살아남는 대가로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용역을 제공한다. 그들을 샤워실로 밀어 넣고 그들의 옷을 태우고 그들도 태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다. 자신만 보인다. 희생자들을 만나고, 만지고, 그들의 비명소리를 들어도 미동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가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1인칭-2인칭 시점에 머무르지 않나. 아무리 끔찍한 일을 하고 있어도, 그런 것을 목격해도 그런 것들은 나 외의 것, 즉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나.
고통을 재현하는 창작자는 고통을 강하게 전달할수록 고통이 멀리까지 전달될 것만 같은 생각의 함정에 빠진다. 그래서 더 끔찍하게 재현하기도 하고, 더 충격적인 걸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고통의 강도가 아니라 고통의 감각에 집중했다. (홀로코스트를 이렇게 재현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사울은 제정신이 아니다. 아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애를 묻어주겠다며 자기 몸도 챙기지 않고 랍비를 찾아 나선다. 동료들의 작전을 위한 화약도 잃어버린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뭐가 우선인지 헷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감독은 끝까지 사울만 조명한다. 관객은 사울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수용소 탈출은 둘째치고 일단 랍비를 찾아서 아들을 잘 묻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 아이는 정말 사울의 아들일까. 처음에는 아들일까 아닐까가 궁금했는데, 점점 아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시체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울이 그를 추모하는 것뿐 아니라 “땅에 묻어야 한다”고 했을 때 ‘아들’의 존재가 무엇일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개인, 인격으로서의 존재가 완전히 무너진 공간이다. ‘토막’으로 일컬어지는 시체들은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못한 채 그냥 몇 ‘개’의 것으로 ‘처리’된다. 그곳에서 사울은 살아남았다가 살해당하는 소년을 목격한다. 사울은 그 ‘한 사람’을 묻어주기로 한다. 살아있다 죽은 것, 그것이 사울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들을 묻어주고자 하는 것, 사실 그게 이 영화에서 사울이 하는 유일한 인간적 행위기도 하다. 랍비를 찾으러 다닐 때 사울은 유일하게 인간으로 존재한다.
마지막에 아이가 강물에 떠나려 갈 때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꼈나. 드디어 짐을 던 것에 대한 안도감? 사울이 결국 아들을 묻어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어느 감정을 더 크게 느꼈는지 역시 영화가 던지고 싶은 질문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당신이 사울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는지, 아니면 더 큰 그림을 그리며 사울이 제발 정신 좀 차리길 바랐는지.
‘일’을 할 때 ‘인간성’은 우리를 종종 방해한다. 이러면 안 된다, 고 이야기하는 무언가가 더 중요한(그렇게 말해지는) 것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걸 잃어버리고 사울은 이 습격 및 탈출 작전의 진정한 일원이 된다.
사울이 아들의 살아있음(죽음)을 보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독일 아이가 사울의 미소를 보는 장면은 겹쳐진다. 시선 속 그곳, 분명히 인간이 살아있었다. 아이는 살기 위해 마구 기침을 했고, 사울은 아이에게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무참히 살해당한다. 살해 장면이 직접적으로 잔인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아이 장면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의사가 코와 입을 막자 다른 장면으로 전환됐던 것 같고, 사울의 죽음은 총소리로만 짐작할 수 있다.) 관객은 사울에게, 아이에게 각각 이입함으로써 당시의 잔인함을 인식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를 쫓아가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점이 관객과 만나는 지점일 수도. 아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울의, 유대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다른 영화 평론을 보면서 오! 싶었던 것. 영화에 전지적 시점이 없는 것처럼, 영화 속 장소에는 신이 없다. 사울은 아들을 매장하기 위해 랍비를 찾는데, 이것은 마치 신을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사울은 결국 ‘진짜 랍비’를 만나지 못한다.
영화를 함께 봤던 시네필들은 이 영화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깃줄에 몸을 던져 죽는 소녀를 트래킹 숏으로 잡은 <카포>라는 영화와 그 비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폭력적인 참사를 이렇게 재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에 김일란 감독은 정치적, 미학적,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지만, 이 영화의 재현 방식이 옳지 않다고는 보지 않는 듯했다.
나도 김일란 감독과 비슷한 생각인데, 최대한 잔인한 표현을 자제하고 관객이 이것을 유희로 소비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희생자의 죽음을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다루거나, 고어물과 같은 쾌감을 선사하려고 하거나, 포르노로 소비할 수 있게 하는 영화는 따로 있다.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충분한 고민 끝에 재현의 방식을 결정했다고 본다. 잔인한지 잔인하지 않은지, 내가 고통스러운지 고통스럽지 않은 지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귀향>이 문제된 것도 가해자의 시선에서 성폭력 장면을 다뤘기 때문 아니었나? (안 봤지만...) 내가 고통스러우니까 이 영화는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고통은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까먹으니까.
결국 참사를 다룰 때 감독은 스타일과 미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적어도 스스로 정치적, 미학적, 윤리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려야 하며 어느 정도 확신이 드는 선까지만 다루는 게 좋겠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비판은 듣겠지만...적어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 같다. 스펙타클한 '그림'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비윤리적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