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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Feb 28. 2019

관용과 생존 사이

<버드 박스>를 보고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사울의 아들>이어서 그런가, 다른 특징들보다는 올림피아가 눈에 들어 왔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올림피아가 아닐까.


올림피아는 생존에 도움은 하나도 안 되면서 심지어 사이코패스에게 문을 열어준다. 사이코패스는 함께 있던 사람을 여럿 죽인다. 올림피아를 포함해서. 그러니까 올림피아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만들어내는 한심한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생존 영화(?)에서 한 명 쯤 있는 바로 그 인물...처럼.


관객들은 안다. 아 이 문을 열면 이 사람들 곧 다 죽겠구나. 이미 나올 캐릭터가 다 나왔으니까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반전과 위기를 위한 장치이겠구나. 열어주지마! 열어주지마! 저 멍청한 놈들 열어주다니! 이제 망했다.


그러나 관객들과 달리 영화 속 인물들은 문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인지, 사이코패스인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우는 것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 사람들과 함께 살아있는데 저 위험한 곳에서 누군가 나에게 SOS를 보내온다면. 관객들이 더 많은 주인공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살길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저 문을 열지 않기를 바라지만, 올림피아는 같은 마음으로 그 문을 연다. 당신이 살기를 바란다는 마음에서.


올림피아는 겉으로는 나약한 캐릭터, 결국 집단에 가장 큰 피해를 가져오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자신의 안위가 걸려있는데도 타인에게 문을 열어줄 줄 아는 어쩌면 가장 단단한 사람이다. 타인을 믿는 사람. 그래서 맬러리에게 자신이 없으면 딸을 지켜달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맬러리는 마지막에 그 딸에게 다시 '올림피아'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나는 이 말이 맬러리가 중간에 '이런 상황에서는 못된 놈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는다'는 더글라스에게 했던 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당신 말이 틀렸기를 바라요. 못된 놈과 죽은 자들 얘기요. 더 많은 사람들이 남기를 바라요."


관용이나 공감은 생존과 대치되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그러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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