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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Dec 26. 2020

거리두기 비행

                                                                                                                                        

"작가님의 글은 뭐랄까, 좀 가식적이랄까.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믿음이 가질 않아서요."

 "아, 진짜 있었던 일인데요..."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승무원이랑 얘길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일반적으로도 신뢰가 가지는 않을 글이에요."


 글을 피드백하는 자리에서 앞에 있는 사람이 내 면상에다 대고 한 말이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는데, 먼저 자신이 경험한 기준만으로 "이런 일은 없을 일"이라고 판단해버리는 모습이 답답했던 것 같다. 세상에 본인이 겪어본 적 없다고 아예 없을 일이라니.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는 어쩌면 평생 모를 타인의 세상을 한 번 살아보고자 함이 아니던가. 나라는 존재로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소설 또는 영화 속의 인물에 한껏 이입하여 보다 보면 또 다른 인생을 한 번 더 산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인데. 그렇게 세상이 한껏 넓어지는 것인데. 나의 비행 일지가 누군가에게 승무원의 삶을 보여주고 재미를 느끼게 하고 싶었던 나는 글이 폄하되는 것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지어진 게 억울했다.


 좋지 않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뚱목이에게 토로했다. 뚱목이는 그런 반응도 있을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승객이랑 기내에서 그렇게 얘기하고 노는 승무원이 잘 없긴 하지." 친구들도 덧붙였다. "나도 승무원이랑 대화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걸?" 예상외로 이런 반응이 이어지니, 나는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무심코 내 글을 읽은 독자에게도 혹시나 미심쩍은 마음이 들 수 있겠단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잘 건다. 조건을 달고 말하자면, 승무원으로 일하는 '기내에서 승객들에게' 먼저 말을 잘 건다. 승무원이라고 꼭 그런 건 아니다. 승무원 중에도 원래 성격은 내성적인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비행을 시작하면 대개 본래 성격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된다. 기내라는 공간은 승무원인 우리가 통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무장으로 비행하는 지금은 내가 기내 안전과 서비스의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평소 가진 성향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이 부여되는 것 같다. 유니폼을 입고 기내에 오르면 나라는 고유한 개인의 색깔이 옅어지고 오로지 승무원으로 일하는 내가 앞으로 나서는 것처럼. 그래서 승무원이기에 승객들에게 말을 잘 걸게 되었다. 안전도 서비스도 승객과의 대화로 확실히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음을 언제부턴가 알게 되어서다. 불안해 보이던 승객에게 먼저 시도한 대화로 비행공포증이 있음을 알게 되어 공포감이 극에 달하지 않게 할 예방 방법을 미리 알려드릴 수 있었던 경우처럼 말이다.   


 승객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생각보다 더 많은 피드백을 받으면 다음 비행에서 발전해야 할 부분이 분명해졌다. 이는 앞으로 만날 승객뿐만 아니라 일하는 나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승객들에게 말을 걸고 또 걸었다. 물어보고 궁금해하면, 생각보다 승객들은 많은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내 비행 인생에 잊지 못할 말을 남긴 승객들도 많다. 열몇 명의 일본인 승무원들 사이에서 혼자 한국인인 나를 보고 "먼저 정 주고 잘해주라"는 할머니 손님의 말씀, 부모님껜 용돈보다 자주 연락드리고 얼굴 비추는 게 최고 효도라는 기러기 아빠 손님의 말씀, 비행기가 무서웠는데 열심히 안전 점검하는 승무원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는 비행공포증 손님의 말씀. 모두 고스란히, 내게 남겨진 말들이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방콕으로 모시고 간 승객과 같이 경악하고 욕을 한 비행도 있었다. 갈 때는 분명 신랑과 함께였는데 돌아가는 비행기에 혼자 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승무원들은 방콕에서 단지 1박을 묵는 스케줄이었기에 어제 비행에서 신혼여행 축하를 받은 승객이 바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 게 의아했다. 그 승객은 갈 때도 올 때도 내가 담당하는 서비스 구역이었기에 알은체를 했다. 살짝 연유를 묻자 승객은 친구들에게는 쪽팔려서 말도 못 하겠다며 오히려 생판 모르는 나에게 넋두리하듯 털어놓았다. 신혼여행지에서 새신랑이 그간 이어온 외도를 알게 되어 무작정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그 당시 미혼이던 나는 몰입해서 듣다가 함께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아마 승객도 한국으로 돌아가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누구에게라도 말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으리라. 우리는 서비스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승객은 하기 할 때 내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그저 고마웠다는 메모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승객들에게 말 걸기에도 눈치가 보인다. 애초에 가까이 다가가지를 못한다. 기내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승무원이기에 더 조심스럽기도 하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다시 승객들과 대화하며 놀 수 있을 때,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이런 얘기까지 나눌 수 있냐며 믿지 못할 비행을 할 수 있을 때, 그 비행들이 쌓이고 쌓여 비행 일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그때가 와야 하는데. 말 많고 탈 많던 비행이 그립다. 그게 바로 진짜 비행의 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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